찻집에 들어가 호젓한 자리를 찾아 앉고도 남은 넉넉한 사십오 분. 차가운 녹차를 주문하고 카메라를 꺼냈다. 그동안 작업한 식물이나 꽃을 찍은 사진들과 그것들을 식물학 그림으로 그려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메모를 했다. 저녁때 그림의 의뢰인인 남승효 교수를 만나 컨셉트에 맞게 가고 있는 건지 의견을 나눌 예정이었다.
“문……비?”
일에 몰두해 있던 문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단정하게 차린 노부인이 금방이라도 얼싸안을 듯 반색을 띠고 서 있었다.
“네…….”
“아유, 내가 보자마자 바로 알아봤지. 한눈에 보기에도 아범 얼굴이 있어서. 나다, 할미. 어젯밤 통화했던.”
문장의 마지막 음절을 살짝살짝 늘어뜨리는 말투로 말하면서 노부인, 아니 할머니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문비는 일어나서 허리를 살짝 숙였다 드는 것으로 예의를 차리고는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던 카메라며 노트며 필기구 등을 주섬주섬 가방에 넣었다.
“네가 우릴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우리는 널 많이 그리워했다. 궁금하고, 보고 싶고, 찾아가고 싶고.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네 어미 고집이 고래힘줄보다 질기고 아범이 또 네 어미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한다고 칼 같이 단속을 하니 늙은이가 뭘 어쩌겠누.”
탄식과 원망이 섞인 하소연을 문비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자신의 할머니라는 말을 믿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급작스레 혈육의 정이 샘솟는 것도 아니었다. 이옥선이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던 할머니를 직접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하기는 했지만.
“너도 궁금은 했겠지? 네 아비, 네 혈육들.”
“네, 가끔은요.”
“그런데 할미를 보고도 왜 이리 데면데면하기만 해? 네 어미가 친가에 대해 뭐라고 말을 했기에?”
엄마가 아버지와 헤어진 일로 할머니는 엄마에게 앙금이 남았나 보다 하고 문비가 씁쓸해 할 때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엄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전화 너머에서 들렸던 그 음색 그 어조였다.
“원, 깜짝이야.”
다가오는 나이 지긋한 이를 향해 할머니가 눈을 흘겼다. 문비는 일어서서 그녀를 맞았다. 할머니에게 엄마라고 불렀으니 고모일 것이다.
“나, 고모야. 네 아버지 손아래 누이. 네 할머니 먼저 내려 드리고, 주차하고 온다고 좀 늦었네. 그러고 서 있지 말고 앉아, 앉아.”
쾌활하고 허물없는 태도 때문인지 엄마와 비슷한 연배와 분위기 때문인지 고모는 할머니보다는 덜 어렵고 약각은 친근감이 들었다.
“네 엄마가 나 대학 동아리 친한 선배였어. 시누올케 되고도 우린 참 잘 지냈는데.”
문비도 얼핏 엄마에게 들은 기억이 있는 일이었다. 봉사 동아리였다고. 그 얘기를 할 때 엄마는 고모를 영채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혼한 마당이니 시누가 아니라 후배지, 하며 상긋 웃었던가.
“그래 봐야 다 지난 일, 부질없는 소리.”
할머니의 핀잔을 가볍게 웃어넘긴 고모가 문비에게 한쪽 눈을 찌긋했다.
“가녀려 보이는데, 몸은 건강하고?”
시켜 놓은 계피차에는 손도 안 대고 냉수를 몇 모금 마시고 난 할머니의 물음이었다.
“네. 건강…… 하시죠?”
할머니라는 소리가 선뜻 나오질 않아 문비는 호칭을 생략했다.
“나야 살 만큼 살았는데 뭘. 참, 너 혈액형이 에이비형이라던데 맞으냐?”
“맞습니다만.”
왜 그런지 석연찮은 감이 들어 문비의 얼굴이 굳었다.
“아범도 에이비형이다.”
“네가 콧날이며 입매며 네 아버지를 닮았어. 네가 친탁한 게 좋아서 그러시는 거야.”
서둘러 고모가 나서서 부연했고, 할머니가 착잡한 얼굴을 끄덕였다.
“식물학 그림 그린다며?”
묻는 고모의 옆구리를 할머니가 쿡 찌르며 눈치를 줬다.
“괜찮아요, 엄마. 문비 얘가 바보도 아니고. 우리가 저를 어떻게 찾고, 휴대전화 번호를 어떻게 알아냈을지, 짐작을 못하겠수? 척하면 척이지.”
요컨대 흥신소 같은 곳을 이용했다는 뜻이겠다. 그 점에 대해서라면 실은 문비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고모의 저 말을 듣기 전까지는. 따져 생각할 줄 몰라서 짐작 못한 게 아니라 자신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을까 하는 의문 자체를 품지 않았던 것이다.
“할미는 네가 무엇이 됐든 음악 쪽으로 나갔지 않을까 했는데 말이다.”
아버지가 음대 작곡과 교수라고, 현재는 안식년을 맞아 제주도에서 지내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할머니는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아버지 직업에 대해서는 문비도 대강 그런 쪽이려니 추측을 두었던 바였다.
“제가 하고 있는 이 일, 좋아서 선택했고 여전히 많이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일이 업이 되고도 계속 좋다니 그 얼마나 좋은 일이니.”
좋다는 말을 한 문장에 몇 번이나 넣어서 하는 말도 자연스러운 사람. 아, 고모는 그런 사람이구나. 청춘의 한때를 친밀하게 공유한 사이라 그런 건지, 고모에게서는 보면 볼수록 엄마와 비슷한 면이 엿보였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문비는 이 자리에 나온 걸 잘한 일로 치기로 했다.
“그런데…… 어째서 두 분만……?”
“아범 말이구나? 그래그래, 그러면 그렇지. 핏줄이 당기는 법이지.”
찻잔을 감싸고 있던 손을 할머니가 덥석 가져가 잡는 바람에 문비는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심정을 숨기느라 애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지금으로서는 그리움보다 이런저런 궁금증이 더 큰 상태였고 그 중심에는 당연히 엄마가 있었다.
“아범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못 나왔다. 자, 봐라. 우리 가족사진. 너 주려고 가져왔다. 거기 헌칠한 아이가 네 남동생. 올해 대학 들어갔고, 피아노 친다.”
아버지가 재혼을 했을 거라는 예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막상 그 가정의 모습을 들여다보자니 문비는 마음이 이상했다. 좋고 싫고의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
배다른 동생에 대해서도 별다른 정서가 일어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승기라는 이름의 저 애와 나는 서로 엄마가 다르니 공유하는 유전자가 2분의 1이 아닌 4분의 1이겠구나, 하는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