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이 난생 처음 듣는, 친정나들이 가는 부인네의 이야기를 담은 긴 노래는 실은 노래가 아닌 내방가사였다. 은성은 재미있다며 듣고 있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영상을 찍었고, 문비는 이 사람 저 사람을 향해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에 바빴다.
편안하고 세련된 느낌의 세미 정장을 입은 라한은 가족인 은성조차 놀랄 정도로 천연덕스럽고 싹싹하게 희수연 맞은 할머니의 손자 역할을 해냈다. 그의 모습이 문비의 카메라에 자주 담겼다.
등에 업은 한실댁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모습. 한실댁을 내려주고 나서는 흰돌댁에게 두 손을 잡혀 덩실거리는 모습. 몇 걸음 물러나 한숨 돌리며 할머니들을 향해 웃는 모습.
폴라로이드 사진 속 그를 문비는 고요히 들여다봤다. 사진 찍히는 줄을 모르는 그의 시선은 어긋나 있지만 그래서 더 자연스럽게 근사했다. 질감과 색감에서 빈티지 분위기를 풍기는 폴라로이드 사진 특유의 감성과 훌륭한 피사체의 시너지였다.
좋은 피사체란 사진을 찍는 이가 자기 안의 빛을 통해 응시하는 대상이다.
언젠가 자신이 했던 이 말을 떠올리던 문비는 문득 시야가 흐릿해지는 걸 느끼고 몇 번인가 머리를 흔들고 눈을 깜빡였다. 최근 그림 작업에 너무 몰두한 탓인 듯했다. 정밀하게 그려야 하는 식물학 그림 작업은 눈을 꽤나 혹사하는 작업이었다.
어깨에 가볍게 얹히는 손이 있어 돌아보니 라한이었다.
“문비씨, 피곤해 보여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라한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문비의 손에서 가져갔다. 셔터를 누르는 그의 손길이 빠르고도 느닷없어서 문비는 방심한 얼굴을 가까이에서 찍히고 말았다. 사진이 나오기가 무섭게 라한은 주머니에 감췄다. 혼자서 가만하게 오래 바라보고 싶은 사진이었다.
“줘 봐요. 이상하게 나온 건 아닌지 확인할 거야.”
문비가 손을 내밀었다. 라한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문비의 손을 악수하듯 잡았다. 누가 볼세라 문비가 화들짝 손을 빼어 은성에게로 달아났다.
종종거리며 가는 문비의 뒷모습을 향해 라한은 다시 셔터를 눌렀다. 라한은 벌써 폴라로이드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유일성, 대체 불가성, 그런 측면에서 폴라로이드 사진은 사랑의 속성을 닮았다.
은성은 할머니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트롯 가요를 멋들어지게 부르고 있다가 문비를 끌어들였다. 얼떨결에 노래를 하게 생긴 문비는 난처함이 앞섰다. 잘 부르고 못 부르고를 떠나서 남들 앞에서 노래하는 걸 즐기지 않는 탓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는 문비가 빼고 어쩌고 할 자리가 아니었다. 흥을 깨고 할머니들에게 실망을 안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비는 눈 한 번 질끈 감기로 하고 언제인지도 모르게 주워듣고 기억하는 이미자의 아씨를 불렀다. 문비의 노래는 은성의 노래와는 달리 구성진 맛은 없었다. 대신 담백하고 고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진을 찍던 라한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쪽을 건너다봤다. 보랏빛이 설핏한 해거름 풍경의 한가운데에 나무의 이름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그녀 하나로 온 마당이 환하고 아늑했다.
어스름이 찾아오고 마당에 불이 밝혀졌다. 한쪽에서는 날벌레들을 쫓기 위한 모깃불이 싸한 연기를 물씬물씬 토해내며 타들어갔다. 멍석 위에 벌어진 만찬은 풍성하고 흥겨웠다.
“이렇게 정성들을 내어 준 것 참말 고마워. 그래도 이번 한 번만이야. 다시는 이러지들 마.”
평소 입에 잘 대지 않던 술을 몇 잔이나 마셔서 얼굴이 볼그레 익은 한실댁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둘러보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걱정도 팔자다. 다시 하래도 힘 부쳐서 못하네.”
“또 이러라고 은근히 바라는 것 같은데 꿈 깨.”
흰돌댁과 내앞댁이 한실댁을 놀렸다. 눈을 흘기는 한실댁의 입에 내앞댁이 술을 들이붓고, 흰돌댁은 안주로 호박꽃만두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이댔다.
노랗고 싱싱한 호박꽃 속을 만두소로 채우고 부추를 묶어 봉해서 쪄 내는 호박꽃만두는 한실댁의 추억의 음식이었다. 먹을 때마다 한실댁은 회상하곤 했다. 자신의 친정어머니만큼 호박꽃만두를 이쁘고 맛있게 만드는 사람은 못 봤다고.
젊은이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사람이 일흔 해를 넘게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생각해 봤다. 일흔 해를 넘게 산 사람을 셋씩이나 눈앞에 두고도 도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노인과 자신들 사이의 세월이 어떤 건지 짐작조차 못 하는 것, 그건 젊음의 한계인 동시에 특권이었다. 그렇기에 젊은이들은 막막하지 않게 때로는 무모하게, 시나브로 늙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술잔에 별이 내리고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상에 턱을 괸 은성이 가끔씩 졸린 눈을 비볐다.
“언니, 은성 언니.”
눈이 거슴츠레한 은성이 듣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우리 이제 일어나요.”
“딱 한 잔만 더 마시고.”
은성이 드는 술잔을 라한이 부드럽게 빼앗았다. 저 딱 한 잔만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언니, 저랑 같이 가요.”
문비가 은성을 부축해 일으키려는데 내앞댁이 끼어들었다.
“은성 처자는 우리하고 더 놀다 여기서 자고 가면 되지 뭐. 그냥 둬라.”
이어 흰돌댁과 한실댁도 거들었다.
“이 집에 방 많아. 두고 가.”
“방만 많아? 마루도 널찍하지. 본인이 더 놀다 간다는데, 두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