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계절

by 화진


“그러고는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이 오질 않는 거야.”


운전대를 껴안듯이 잡은 은성이 말을 이어 나갔다.


“우유 한 잔 데워 먹을까 하고 주방으로 가는데 불이 켜져 있겠지? 할머니하고 어머니가 술 한 잔씩을 앞에 놓고 식탁에 마주 앉아 계셨어.”


세 모금쯤 남은 싱글몰트위스키를 입을 떼지 않고 다 마셔 버리고서 소혜 여사가 중얼거렸다. 유순한 은성이가 그렇게 모진 말의 칼날도 휘두를 줄 아는 게 다 어디서 왔겠어, 나지. 이번엔 내가, 뿌린 대로 거둔 게야.


석란이 술잔을 만지작만지작 돌리며 따뜻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대견하시죠? 은성이가 정말 필요할 땐 자기 의사를 똑 부러지게 밝힐 줄도 아는 아이라서.


그 밤은 은성에게 불면의 밤이 아니라 크리스털 잔 안에서 흔들리는 금빛 액체 속 얼음이 옐로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반사하던 밤으로 남았다.


“자, 이제 그만 출발해 볼까.”


시동을 거는 은성의 얼굴에 다시 해말간 표정이 돌아왔다.


은성의 소녀 같은 순수함이 문비는 좋았다. 언젠가 은성은 스스로의 그런 면에 대해 부유한 환경이었기에 가능했을 온실 속 화초의 순진무구함이라고 자조 섞인 평을 했던 적이 있지만.


그녀를 둘러싼 부유함은, 은성 자신의 말대로 장애와 상쇄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흔치 않은 다행인 건 분명했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심신을 고단히 할 필요도 없고, 원하는 만큼 취미를 충족하며 평온하게 살 수 있으니.


문비는 바랐다. 은성의 동화적 정서가 계속 지켜지기를. 언젠가 그녀가 동화 같은 사랑과도 조우하기를.


내앞댁의 집은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로 가득했고 음식 만들기는 얼추 끝나가던 참이었다. 문비와 은성이 몇 번에 걸쳐 차에서 집으로 나르는 떡이며 과일들이며 과자며 플라워 케이크 등등을 보며 내앞댁과 흰돌댁은 연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이 야무지게도 챙겼네.”


“옷은 또 어찌 이리들 얌전하고 기특하게 입었을꼬.”


“내 말이. 꼭 발 달린 꽃들이 마당을 왔다갔다하는 것 같구먼.”


마당에 멍석이 깔리고 병풍이 쳐졌다. 멍석 위에 직교자상이 놓이고 선풍기들도 멍석 근처로 불려 나왔다. 상 위에 색색의 떡과 과일, 과자가 고이어 올라가고 문비가 만든 플라워 케이크도 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술 주전자와 술잔을 올린 자그마한 소반을 직교자상 앞에 가져다 뒀다.


내앞댁과 흰돌댁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고 문비와 은성은 마루에 엉덩이를 걸쳤다.


오후의 끝자락, 더위와 하늘이 묽어지고 있었다. 푸른 잉크처럼 흐르는 산그늘과 경사진 냇물 바위에 이는 새하얀 물보라에 여름은 짙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계절이 그러나 가장 짧은 계절이 되고 말리라는 역설이 눈앞에서 끊임없이 흘러가고 흩어졌다.


어쩌면 그런 역설이야말로 아름답고 귀한, 여름의 묘미라고. 생각하다 문비는 저도 모르게 흥얼흥얼, 빛깔이 바뀌는 하늘과 산그늘과 물보라의 여름을 음계로 바꿔 본다.


“무슨 노래야? 듣기 좋다.”


은성이 묻는 바람에 문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노래는 아니고 그냥…….”


문비가 허둥거렸다. 뇌리를 떠다니던 소리가 무심코 새어 나와 부끄러워진 건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럼 연주곡이구나. 뭔지 알려 줘. 나중에 찾아서 들어 보게.”


“네? 아, 그게…….”


몇십 년 참았던 기침을 토해낸 사람이 있다면, 그런데 하필 그 자리가 기침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인지라 혼자 괜히 무안해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문비는 머뭇거렸다.


“금방 떠오르질 않나 보네. 아, 할머니들 나오신다.”


내앞댁과 흰돌댁이 어디 결혼식에라도 참석할 때나 꺼내 입는 한복을 입고 나왔다. 기왕 베풀어 주는 희수연이니 조촐할지언정 갖출 수 있는 건 갖춰서 그럴 듯하니 한 판 벌여보자는 작정들이었다.


때마침 라한과 한실댁이 산죽 울타리 밖 저만치에 모습을 드러냈다. 라한은 미리 말을 맞춘 대로 한실댁의 집에 들러 한실댁을 청해 함께 오는 길이었다. 날이 날이니 만큼 손주가 할머니 모셔 오듯 곰살궂게 모시고 오라는 내앞댁과 흰돌댁의 당부를 그는 착실히 이행했다.


라한의 손에 이끌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빛으로 걸어오던 한실댁은 고임상의 실체가 가까워지면서 얼굴이 굳었다. 한실댁은 유일한 의지였던 남편 한실양반이 세상을 뜨고부터는 개인적이고 소소한 의미가 붙은 날 챙기는 걸 열없는 유난으로 여기는 성향이 더욱 완고히 굳어져 그런 일들을 거의 완전히 회피하며 살아왔다.


“이게 다 뭔가? 뭣들 하자는 거야?”


주위를 한 바퀴 휘둘러본 한실댁이 불편한 기색으로 내앞댁과 흰돌댁을 다그쳤다.


“거, 너무 그러지 마. 한 번씩은 남의 말도 좀 듣고, 남 하자는 대로도 좀 하고, 그러면서 살면 누가 잡아간대?”


내앞댁이 나서서 타이르듯 말하고 흰돌댁은 옆에서 ‘별난 것도 정도껏이지.’ 하는 눈빛으로 혀를 찼다.


“해도 너무들 하니 내가 이러지. 다들 말끔하게 뻗쳐 입었는데 나만 무릎 쑥 나온 일바지 차림 아닌가 말이야. 모양 빠지게!”


이쯤 된 판에서는 자신의 고집을 세워 사양하는 것이 도리어 민폐가 되겠다고, 한실댁이 마음을 바꿔 먹은 것이었다. 좌중을 좀 골려 줄 요량으로 한실댁은 일부러 표정을 풀지 않고 닦아세우듯 말했다.


난감하게 듣고 있던 사람들이 마침내 안도하며 웃었다. 그제야 문비와 라한의 눈길이 만났다. 웃음기 걸린 눈에 석양빛이 담뿍 부셨다.


“방에 들어가면 어디서 많이 보던 옷이 있을 테니 갈아입고 나와. 아이고, 내가 그놈의 한복 훔쳐다가 몰래 손질한다고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수명이 줄었는지.”


흰돌댁의 과장된 푸념을 귓전으로 흘리며 한실댁은 방으로 들었다. 한복을 입고 다시 나온 한실댁을 문비와 은성이 병풍이 쳐진 자리로 안내했다.


하룻저녁 손주들이 되기로 한 문비와 은성, 라한이 나란히 절하고 술을 올릴 때는 감정 잘 안 드러내기로 정평이 나 있는 한실댁도 회한 서린 눈가를 스리슬쩍 몇 번 찍어냈다.


플라워 케이크에 켠 촛불을 불어 끈 한실댁을 라한이 둥실 업었다. 내앞댁과 흰돌댁은 노랫소리에 어깨춤을 싣고는 라한에게 곡이 끝나기 전에 한실댁을 내려놓으면 큰일 나는 거라고 익살스레 을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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