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어룽이 져 있음을

by 화진


“오셨어요?”


“미리 가서 내앞댁 할머니랑 흰돌댁 할머니 도와드리자고. 문비씨, 준비 다 됐지? 근데 안색이 왜 그래? 어디 아픈 거 아냐?”


즐겁게 말하던 은성이 걱정스레 문비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프긴요, 아니에요. 소파에서 잠깐 졸았더니 정신이 좀 없어서요. 들어오세요. 옷만 갈아입음 돼요.”


문비가 짐짓 호들갑스럽게 굴면서 은성을 맞아들였다.


“마땅한 옷 있어? 어른 희수연에 어울릴 만한 옷 말이야. 할머니들께서도 좋아하실 옷.”


흰색에 연한 색감의 색동이 들어간 저고리와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딸기크림 색감의 치마로 이루어진 생활한복을 입은 은성이 단아한 걸음으로 거실로 들어서며 뚱겼다.


“언니 차림이 딱이네요. 과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고. 전 그런 옷은 없으니 단정하게 입는 데 의의를 둬야겠어요.”


“그럴 줄 알고 내가 문비씨 것까지 준비해 왔지.”


뒤로 감추고 있던 쇼핑백을 은성이 짜잔 하며 내밀었다.


“그럼 좀 빌려 입을게요.”


“선물이야. 막 비싸고 그런 거 아니니까 부담스러워 하지 마. 부담 가지면 나 서운해.”


“그래도…….”


“언제 나랑 읍내 나갈 일 있으면 내가 갖고 싶은 거 뭐 하나 선물해 줘. 그럼 되겠지?”


“그렇게 해요, 그럼. 고마워요. 두고두고 잘 입을게요.”


문비가 쇼핑백을 받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저고리는 흰색에 치마와 같은 색의 레이스 자수가 들어갔고 치마는 올리브그린 톤으로 주름을 촘촘히 잡아 풍성했다. 생활한복인 데다 치마 길이가 샤넬라인이라 적당히 격이 있으면서 발랄한 맛도 있었다.


“플라워 케이크, 구경해도 돼?”


거실에서 은성이 물었다.


“당연히 되죠. 보자기 풀고 보세요.”


단발머리를 그러모아 정갈하게 묶으면서 문비가 대답했다. 비어져 나오는 머리카락을 실핀으로 고정하고 문비는 거실로 나갔다.


“와아, 문비씨 너무 잘 어울려. 너무 예뻐. 종아리는 또 어쩜 그렇게 가지런해? 완전 내가 보는 순정만화에 나오는 주인공 같아.”


살짝 안짱다리인 은성이 부러운 눈길로 무구하게 칭찬했다. 문비는 쑥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다.


“플라워 케이크 진짜 아름답다. 이브 피아제 장미가 들어가서 향기도 너무 좋고. 얼핏 보면 먹음직스럽기도 하고. 만드는 법, 나도 가르쳐 줄래?”


이브 피아제 장미는 은성의 할머니인 소혜 여사도 좋아하는 장미였다. 소혜 여사는 피아제 사의 로즈 컬렉션도 사랑해서 며느리와 손녀들에게 선물하곤 했다.


“가르쳐 드릴게요. 조금만 배우면 언니가 저보다 잘 만드실 거예요. 언니는 자수도 잘 놓고, 재봉도 잘 하고, 음식도 잘 만들고, 워낙 손재주가 좋으시니까.”


문비의 가슴을 복잡하게 만들던 문제들은, 고운 옷을 차려 입고 은성과 재잘거리는 사이 없어지지는 않았어도 저만큼 밀려났다. 소소한 행사와 다정한 사람들이 목전에 있다는 것이 문비는 고마웠다. 사람이란 사람으로 힘들고 사람으로 위안 받는 법이라고.


은성이 마련해온 떡은 라한의 차 안에 있다고 했다. 이번에 은성은 라한의 차를 직접 운전해서 본가에 다녀왔던 것이다. 짐이 제법 있으니 차를 타고 내려가자는 은성의 제안에 문비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걱정 마. 나 운전 잘해.”


운전석 문을 열면서 은성이 자신 있게 말했다.


“네. 아, 근데 본가 가셨던 그 문제는 어떻게 됐어요? 언니 얼굴 밝은 걸로 봐선 할머니하고 얘기가 잘 된 것 같은데?”


안전벨트를 맨 은성이 시동을 걸지 않고 숙연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결론적으로 할머니께서 어느 정도 양보를 하긴 하셨어. 실은 그게 내가 할머니 가슴에 못 박는 못된 소리를 했기 때문이지만.”


아이처럼 쾌활하고 맑던 은성의 표정이 문득 어른스럽게 변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나서 은성이 털어 놓았다.


“선 본 그 사람하고 결혼할 수 있다고. 할머니께서 끝내 하라고 하시면. 다만.”


은성이 문비를 돌아봤다. 은성의 둥근 눈이 비장하게 번뜩였다.


“그 결혼을 하면 나는 평생 비참하고 불행할 거라고. 하고 싶지 않은 결혼, 원치 않는 상대이기 때문에. 웃을 자신은 없어도 이 악물고 견디는 데 까진 견뎌 보겠다고. 오로지 할머니의 바람을 충족시켜 드리기 위해서.”


천진하고 순한 은성이었지만 한편 몹시도 예민하고 완강한 면이 있기도 했다.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이면 제 성질을 못 이기고 고스란히 게워내 버리며 자지러지던 영유아기의 은성을 소혜 여사는 기억하고 있었다.


결혼은 절대로 못하겠다는 반항보다 정 하라시면 하겠다는 순응이 오히려 소혜 여사를 서늘한 꺼림칙함으로 내몰았다. 독단적이기는 해도 섬세한 통찰 또한 어느 정도는 갖춘 소혜 여사였기에 자신의 강요가 자칫 은성의 인생 자체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몰아갈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할머니께선 처음에는 불같이 진노하시더니 차츰 침착해지셨어. 그러더니 말씀하시는 거야. 이번에 만난 사람하고는 연이 아닌 거 알았다고. 반 년쯤 있다가 다시 선을 보라고. 육 개월에 한 번 정도로 선을 보되 결혼은 내가 먼저 하겠다고 하기 전엔 강권하지 않으시겠다고. 그 말씀 하시는 할머니를 보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우리 할머니도 많이 늙으셨구나.”


문비가 말없이 가만히 은성의 손을 잡았다. 은성의 작은 손이 문비의 손을 맞잡았다. 문비의 눈을 본 은성은 느낄 수 있었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문비의 마음에도 자신의 것과 닮은 어룽이 져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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