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남은 젖은 자국

by 화진


‘네 아버지는 그 지경을 하고서도…….’


할머니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처음부터 석연찮았던 할머니의 태도와 방금 저 말이 풍기는 뉘앙스가 문비는 영 개운치가 않았다.


아버지, 어디가 편찮으시기라도 한 건가? 만약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내내 단절된 채로 살아왔던 내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효녀 심청처럼 굴어야 하나?


어쩌면 할머니의 뜻과 바람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할머니에게는 당신 자식이 가장 소중할 테니까. 그러나 문비는 자신에게 심청의 효심 같은 것이 갑자기 봄날 죽순 돋아나듯 돋아날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학습된 양심이 그런 자신을 찔러 대리라는 예감이었다.


아니, 모두가 다 부질없는 가정일 뿐이라고, 문비는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가만히 앉아 헝클어진 마음을 추스른 문비가 플라워 케이크를 투명 상자에 넣고 보자기로 쌌다. 냉장고 앞으로 가 차가운 녹차를 꺼내 한 모금 마시는데 휴대 전화가 다시 진동음을 냈다.


아는 번호였다. 알아만 놓고 휴대 전화에 입력은 하지 않은, 이상하게 단 한 번에 외워지던, 아버지의 번호. 통화 버튼만 누르고 가만히 있었다.


“여보세요? 문비…… 듣고 있니?”


가을의 저녁 바람 소리 혹은 그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낙엽의 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였다. 차분하고 쓸쓸한.


“……네.”


“네 할머니께서 요즘 좀 신경과민이시니 당분간 할머니 전화는 네가 받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저어 혹시 어디가 편찮으신 건……?”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서름서름하기는 해도 위화감이 없다는 점이 문비는 신기했다.


“누구…… 나 말이냐?”


“네.”


옅고 짧은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문비는 그 웃음소리가 내포했을 심정들을 무심코 헤아려 본다. 진심과 과장, 감격과 회한, 그 어디쯤을 배회하는 연약한 마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관계의 진정한 강자는 문비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식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있는데도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자라야만 했던.


“아니다. 건강해. 그러니 넌 마음 쓸 것 없다.”


진위 여부는 알 길 없었다. 무턱대고 믿을 만큼 단순하지 않으면서도 문비는 아버지의 말을 믿기로 한다. 깊이 생각하고 속 끓이고, 그런 걸 하고 싶지 않았다.


“정인이 말이다.”


아버지의 입을 통해 돌연 이름으로 등장한 엄마가 문비는 낯설고 반갑고 서글펐다. 문비를 부를 때와는 조금 다른 결의 부드러운 여운이 ‘정인이.’라는 말에 실려 있었다.


“네.”


“마지막 순간이 힘들지는 않았니?”


눈물이 핑 돌면서 목이 잠겨 문비는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의식은 혼미했지만 고통스러워 보이진 않았어요.”


“편안히 갔구나. 정인이는 그런 복을 누릴 자격이 있지.”


영후의 눈앞에 정인을 처음 만나던 장면이 오래된 필름처럼 재생됐다. 축구공 맞은 뒤통수를 더듬으며 인상을 찡그리고 돌아보는 영후. 당황스럽고 미안한 표정 아래로 구겨 참은 웃음이 설핏하게 새어 나오던 정인.


오월의 푸른 빛, 청춘의 푸른 빛, 눈동자에서 반짝이던 검고도 푸른 빛. 푸르고 찬란했던 그 하오의 찰나, 영원의 찰나.


“정인이, 점역 봉사, 그거 계속 했니?”


“네.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쭈욱 하셨어요.”


커튼처럼 침묵이 드리워졌다. 문비는 그 너머의 풍경을 짐작할 수 없었다. 오래 품고 살았던 질문만이 문비의 가슴에 파도치며 차올랐다.


“두 분…… 왜 헤어지신 거예요?”


침묵 너머의 풍경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침묵은 한층 두터워졌다.


그렇게 사랑했다면서요, 왜요? 엄마한테 뭘 잘못하신 거죠? 공연히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일어서 문비는 그러지 않으려 입술을 감쳐물었다.


“다 내 책임이다. 나중에…… 전화로 말고…… 나중에…….”


파경의 이유를 물을 권리가 문비에게는 있다고 영후는 늘 생각해 왔고, 언젠가 자신이 그 질문 앞에 불려 나오리라는 각오 또한 해왔던 바였다. 회피할 뜻은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작년에 정인이를 만났다. 학교로 찾아왔더구나. 네 신상을 자세히 알려주고 절대로 먼저 나서지는 말고 멀찍이 지켜만 보다가 네가 찾아오거나 네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때는 내 할 도리를 다 하라고 당부하더구나.”


갈라선 후로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영후는 정인에게 그러마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킬 작정이었다. 정인에게 정인 나름의 의도가 있었듯이 영후에게도 영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옥선 여사가 나서서 문비를 찾고, 아이 앞에 불쑥 나타나 버렸던 것이다.


“엄마가요? 엄마가 그랬다고요?”


놀란 문비가 되물었다. 일언반구 언질이 없었던 일이었다. 전혀 낌새채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정인이가 말한 그대로 할 게다.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겠다만 너에 대한 그리움이 없어서가 아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니야. 솔직히 정인이는 때때로 잊고 살았어도 네 존재는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


자식이라는 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잊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언제든 어려움이 있거나 필요할 때는 찾아오너라. 나를 찾기 싫다면 영채, 네 고모 말이다. 영채한테라도 연락해. 너도 봐서 알겠지만 영채는 품성이 정인이하고 많이 비슷하다. 널 보고 와서 그러더구나. 자기는 무슨 일이 있든 무조건 네 편에 설 거라고.”


이번에는 문비가 입을 다문 채로 시간만 흘려보냈다. 그러겠다는 말은 내키지 않았고,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무거운 정적에 가라앉던 문비를 건져낸 건 은성의 목소리였다. 은성이 현관에서 문비를 불렀다.


“손님이 와서 이만 끊어야겠어요.”


“알았다. 잘…… 잘 지내고.”


아쉬움이 싸락눈처럼 싸르락거리는 것 같은 어감이었다. 싸락눈 알갱이가 튀어 와 문비의 마음에도 젖은 자국 몇 점을 남기고 만다.


“안녕히 계세요.”


착잡하게 인사하고 전화를 끊은 문비가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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