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쩍지만 감미로운

by 화진


애초에 느긋한 하루를 작정하고 나섰기에 시계를 볼 필요가 없었다. 아직 선선함이 남아 있는 숲 그늘 아래 풀밭 위의 식사는 살갑고 한가로웠다.


돗자리를 걷어 다시 차에 탄 두 사람은 승용차 안이라는 협소하고도 고립된 공간이 자아내는 은근하고도 미묘한 분위기를 갓 피어난 새싹처럼 가만히 다루면서 말하고 눈웃음 지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함께 고개를 까닥이기도 했다.


“독일은 시골 마을이든 도시든 광장이 있으면 농민장터나 농민시장이 열려서 지역 농민들이 직접 농사지은 것들은 팔아요. 거기도 시장엔 나름의 정감이 흘러요. 그게 좋아서 광장에서 열리는 시장에 가끔 가곤 했어요.”


시장 가까운 공영주차장이 있어 거기에 주차를 하고 걸으면서 라한이 회상했다.


시장 특유의 활력과 생동, 독일 농부들의 투박한 태도에 숨은 배려와 자상함에 기대어 가슴 스산한 향수를 잠시나마 위로받곤 하던 시절이었다. 늘 화훼를 팔러 나오던 아주머니로부터 라한은 늦봄이면 꼭 작약 꽃을 샀다.


“그 아주머니 연배가 어머니하고 비슷했거든요. 서로 얼굴이 익고 나니 작약 꽃이 나올 때 넉넉히 사 뒀다가 조금씩 오래 꽃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시더라고요.”


가운데가 말랑해질 무렵의 봉오리 절화를 밀폐용기에 눕혀 냉장 보관하면 몇 주 정도까지는 생생하니 그때그때 몇 송이씩 꺼내 화병에 꽂으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꽃봉오리는 냉장고 안에서 거의 한 달 남짓을 버텨 줬다.


반드시 봉오리 가운데가 말랑해졌을 무렵의 것이어야 한다고, 작고 단단한 봉오리를 냉장 보관하면 꽃이 피지 않는다고. 독일 농부 아주머니는 몇 번이나 주의를 줬다. 붉은 얼굴에 얼비치던 소박하고 선한 웃음에서 라한은 닮은 데라고는 전혀 없는 어머니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었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일 다 거기서 거기라는 이치가 먼 타국에서 위안이 돼 준 거네요.”


걸음을 늦추면서 문비가 말했다. 시장의 초입이었다.


“그런 셈이죠.”


독일의 시장에서 모국의 정과 닮은 정서를 느꼈듯이 지금의 라한은 모국의 시장에서 독일 생활의 추억을 되새긴다. 그리운 곳의 좋은 기억이 현재를 풍요롭고 견고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된다는 걸 라한은 독일에서 배웠다.


시장 전체를 한 바퀴 돌며 구경을 한 다음 과일가게를 다시 찾은 두 사람을 늙수그레한 주인 내외가 반갑게 맞았다.


“다시 오셨네? 그래, 뭘 좀 사시려우?”


안쪽 마루에 앉은 안노인이 묻고 마루 앞 간이의자에 앉아 있던 바깥노인이 다가왔다.


“수박부터 볼게요.”


스마트폰 메모를 확인한 라한이 수박 앞으로 갔다.


“응. 골라 봐요. 수박 다 좋아. 하나같이 배꼽이 쪼끄맣고 무늬가 선명하잖아.”


역시 대답은 안노인이 하고, 고르는 걸 돕는 건 바깥노인이 했다. 안노인이 앉은 마루 옆에 전동휠체어가 세워져 있다. 라한이 수박 고르는 걸 보면서 안노인은 옆에 놓인 납작한 종이 박스 하나를 집어 네모나게 접었다.


문비와 라한이 고른 수박을 바깥노인이 안노인에게 가져갔고, 안노인은 사각형의 종이 박스에 수박을 넣고 손잡이 부분까지 갈무리해서 다시 바깥노인에게 건넸다. 빈틈없이 손발이 척척 맞았다.


동네 할머니들이 일러 준 꼭 사야 할 과일 구색 외에도 라한과 문비는 몇 가지 과일을 더 사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은성이 만든 색 고운 면 장바구니들을 안노인이 칭찬했다. 예쁘다고, 저렇게 다들 장바구니 가지고 다니면 좀 좋으냐고.


라한은 수박이 든 종이상자와 장바구니들을 자신이 다 들겠다고 하고 문비는 자기도 보기와 달리 깡과 힘이 세서 무거운 거 잘 든다고 나눠 들어야 한다고 우겼다. 아기자기한 옥신각신을 지켜보던 안노인이 한 마디 했다.


“신랑이 각시 하자는 대로 하는 게 맞겠구먼.”


여태 묵묵히 할 일만 하던 바깥노인이 마루에 걸터앉으며 마침내 목소리를 내놓았다.


“평생 그러고 살면 속 편하지, 나처럼.”


신랑 각시라는 말이 주는 어색한 감미 때문에 문비와 라한은 조금은 멋쩍은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굳이 신랑 각시가 아니라고 바로잡을 필요 따위는 없는 일. 그저 조용히 장바구니를 나눠 들었다.


과일가게를 나서는 두 젊은이의 등 뒤로 오랜 세월 온건하게 마주 늙어온 부부의 눈길이 황혼의 빛살처럼 포근했다. 길은 때때로 험하고 거칠기 마련이지만 서로에 대한 온화함과 측은지심을 놓치지 않고 함께 늙을 수 있다면 그건 축복이라는, 소리 없는 읊조림처럼.


“케이크 재료 산다고 하지 않았어요?”


과일을 차에 넣고 문비가 앞장서서 간 꽃집 앞에서 라한이 물었다.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지 않는 문비가 케이크를 직접 만들 거라는 말을 했을 때만큼이나 의외라는 기색이었다.


“케이크를 만들겠다고 했지 먹는 케이크를 만들겠다고 하진 않았잖아요?”


반쯤 놀리는 듯한 말투로 대꾸한 문비가 냉큼 유리문을 열고 꽃집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단발머리 뒤통수가 명랑하게 흔들리다 차분히 가라앉았다.


라한은 그윽하게 바라보다 따라 들어갔다. 의외성이라는 건 또 그녀를 얼마나 빛나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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