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엄마가 대학 시절 만났다는 건 고모의 입에서 지나가듯 흘러나온 사실이었다. 할머니와 셋이 만난 자리는 이미 남남이 된 지 오래인 부부의 연애사를 꼬치꼬치 묻기에 적합한 자리가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비는 자꾸만 알고 싶어졌던 것이다.
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생각 끝에 그러지 말기로 했다. 그 일을 듣기 위해 통과해야 할 이런저런 감정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니까 고모에게서 한 뿌리에 달린 감자알처럼 줄줄이 소환될 할머니와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 아직은.
그리고 가족의 눈이 아닌 타인의 눈에 비친 두 사람, 이제는 희미해졌을 풍문 속에 남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궁금했다.
소현은 전했다. 그 시절의 두 사람, 제각각 동경하는 무리를 거느린 아름다운 청춘이었다고. 그러한 두 사람의 연애는 일대 사건이었으며 주위에서 선망해마지않은 연애였다고.
한 사람은 과 친구들과 모여 족구를 하고 있었고 한 사람은 그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는. 한 사람이 잘못 찬 공이 지나가던 사람의 뒤통수를 정통으로 가격했다는. 사과하려고 달려간 사람과 화내려고 돌아본 사람이 순간 반하고 말았다는.
얼핏 흔한 이야기일 뻔했으나 족구를 하던 사람이 여자, 뒤통수를 맞은 사람이 남자였다는 데에서 식상함을 슬쩍 비껴간 이야기였다. 엄마 이정인은 그 시절 수학과 족구여신으로, 아버지 가영후는 작곡과 얼음남으로 평판이 나 있었다고 했다.
정인은 족구를 매우 잘 하는 여학생으로 예쁘고 활달하고 워낙 스스럼없는 성격이라 오히려 남자들이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고백할 틈을 찾기 어려웠고, 영후는 호감을 표하는 여자들을 즉석에서 냉정하게 거절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 두 사람이 축구공을 매개로 서로 죽고 못 사는 연인으로 발전했다고. 스스럼없던 여자는 얼음남의 앞에서만은 수줍음을 탔고, 얼음이었던 남자는 족구여신에게만은 가을 햇살이었다고.
시기와 질투, 응원과 격려의 시선이 한동안 둘을 따라다녔다고. 그런 시선들은 오래지 않아 시들해졌으나 두 연인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져 졸업을 하던 그 해에 결혼이라는 통과 의례를 치렀다고.
동문회와 봉사 동아리 인맥을 더듬고 더듬어 소현이 수소문할 수 있었던 건 여기까지였다. 짤막하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전화를 끊은 문비는 한참을 그대로 산그늘에 앉아 있었다.
젊고 아름다웠고 불꽃처럼 사랑했다는 그들인데 어째서 끝까지 함께 행복할 순 없었던 걸까?
여행을 가라던 엄마의 유언에 대해 아버지에게 말하면 엄마가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짚이는 게 있다는 대답을 혹시나 들을 수 있을까? 한때 아버지는 엄마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을 테고, 가장 빛나던 젊은 날의 정서와 사랑의 역사를 공동으로 써 내려갔던 사이였으니.
공중을 나는 잠자리의 수가 차츰 늘어가는 걸 본 문비가 몸을 일으켜 걸음을 재촉했다.
잠자리들이 모여드는 건 저물녘이 가까워 온다는 신호였다. 잠자리 떼가 연푸른 하늘을 가득 수놓았다 사라지면 어느 결에 황금빛 석양도 자취를 감추고 땅거미가 스민다. 여름 산골짜기의 저녁 풍경은 잠자리 날개를 타고 온다.
*
살구색과 하늘색의 나뭇잎 무늬가 연하게 들어간 린넨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문비가 별장에서 나와 다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는 동안 라한은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아침 풀숲처럼 싱그러웠다.
오늘 문비가 여느 때와 달리 옷을 고르는 데에 긴 시간을 들였다는 걸 라한이 알 리는 없지만. 모르긴 몰라도 라한은 그녀가 마대로 된 자루를 걸치고 나왔대도 지금처럼 눈이 부셨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비슷한 차림새로 만난 두 사람이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교환했다.
“운전 내가 할게요. 괜찮죠?”
차가 서 있는 공터로 걸어가며 라한이 문비의 의사를 물었다.
“괜찮기만요? 대환영이에요. 저 실은 운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문비의 차 운전석에 앉아 시트를 조절하던 라한이 장난 섞어 말했다.
“요리하는 것도 안 좋아해, 운전하는 것도 안 좋아해. 가문비씨, 좋아하는 것도 있긴 있는 거죠? 말해 봐요. 뭘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는 척 라한을 가만 응시하던 문비가 시선을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며 답했다.
“누가 요리해 주는 모습 보는 거, 누가 운전해 주는 모습 보는 거. 그 누가 옆에 있는 거.”
지나쳐가는 숲과 나란히 따라오는 개천을 향해 있는 문비의 눈에 수줍고 미더운 웃음기가 반짝였다. 안온함이 서린 매초롬한 옆얼굴을 보다가 라한은 손을 뻗어 순백자 같은 뺨을 만지고 싶은 욕망을 지그시 억눌렀다. 때로는 실현하지 않은 욕망이 더 달콤하다.
지금 라한과 문비는 인근의 중소도시로 외출하는 참이었다. 내일 있을 한실댁의 희수연 때문이었다.
내앞댁과 흰돌댁은 저녁 식사와 뒤풀이 술상을 맡았고, 라한과 문비는 과일과 케이크, 내일 돌아올 예정인 은성은 떡을 맡기로 돼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 경관 좋고 차 세울 자리가 마땅한 곳을 찾아 멈췄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커다란 소나무 그늘이 드리운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주변이 온통 송림이라 지나가는 바람에도 송진내가 묻어 있었다.
“라한씨 말 듣기를 잘했다. 어디 가는 길이 아니라 소풍 나온 것 같아요.”
이렇게 아침을 먹자고 한 건 라한이었다. 어젯밤 문자메시지로 출발시간을 조율하다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상쾌한 공기를 가득 심호흡하는 문비의 밝은 낯빛이 라한에게 은은한 기쁨을 줬다.
라한은 도시락을, 문비는 커피와 물을 꺼냈다.
문비가 기대감에 차서 찬합 뚜껑을 여는 모습, 가지런히 들어 있는 푸릇한 머윗잎 쌈밥을 급하게 손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 양 볼이 볼록해진 채로 우물우물 열심히 먹는 모습, 맛있다는 뜻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모습,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까지.
보고만 있어도 라한은 배부르고 행복했다.
적당한 정도의 긴장과 활기 위로 시간은 달보드레 흐르고 남자도 여자도 많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