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뿐인 계절

by 화진


“어서 와, 어서.”


안마루에 앉아 있던 내앞댁과 흰돌댁이 손짓했다. 문비와 라한은 방충망으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실댁 할머니는요?”


“안 불렀어.”


자기 집처럼 한쪽에 안반을 놓고 앉아 홍두깨로 칼국수 반죽을 밀고 있던 흰돌댁의 대답은 무심했다.


“왜요?”


문비가 내앞댁을 보며 한 번 더 물었다.


흰돌댁이 칼국수 미는 날은 그게 누구네 집이 됐든 반드시 세 노파가 모이는 게 거의 불문율이었다. 키가 크고 마른 내앞댁과 몸집이 살짝 넉넉한 흰돌댁은 있는데 보통 체격의 한실댁만 없으니 이 빠진 옥수수나 포도송이처럼 보기에 허전하다.


“역적모의 하려고 그런다.”


내앞댁이 웃자 흰돌댁도 알맞은 두께로 밀린 반죽에 마지막 밀가루 칠을 하다가 키들거렸다.


“한실댁이는 국수 삶을 때 부르고, 그 전에 얼른 상의를 하자. 다른 게 아니고, 다음 주에 한실댁이 생일이 있는데 그냥 생일이 아니고 희수연이다. 생일 챙기는 걸 하도 질색해서 우리가 그동안은 알고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 환갑이고 칠순이고 모조리 다. 그랬지마는 내하고 흰돌댁이가 암만 생각을 해 봐도 희수연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겠더란 말이지.”


손은 부지런히 애호박을 썰고, 눈은 문비와 라한에게 둔 채로 내앞댁이 말을 이어갔다. 희수연은 77세 생일을 축하하는 잔치다.


“한실댁이나, 내나, 여기 흰돌댁이나 인제 살아 봐야 얼마나 더 살겠누.”


“내앞댁이 말이 맞다. 희수연하고 미수연 사이가 십 년이다. 당장 내일 아침도 장담 못 하는데 십 년을 누가 장담해. 십 년 후에 내가 죽고 없을지 지가 죽고 없을지 어찌 알아. 이번 희수연은 챙기는 게 옳지. 암, 옳고말고.”


문비와 라한이 끄덕이며 시선을 마주쳤다. 내앞댁과 흰돌댁이 자신들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어떤 것인지 알 듯했다.


“그런 역적모의라면 저희도 기꺼이 가담하겠습니다. 다음 주면 누나도 와서 같이 축하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당일 저녁까지 한실댁에게는 철저히 함구하기로 뜻을 모으고, 몇 가지 상차림 음식 준비를 분담했다. 그런 다음에 내앞댁이 도로 가로 나가서 물 건너 한실댁의 집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저녀어어억, 건짐국수우우, 우리 지이이입.


이내 한실댁이 와서 노인네 셋과 젊은이 둘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콩가루 들어간 칼국수로 말아 낸 건짐국수는 고소했고, 양념을 엷게 한 얼갈이김치는 시원했다. 내앞댁의 강권에 못 이기는 척 한 사발씩 받아 마시는 더덕막걸리가 혀에 착착 감겼다.


“손전등 찾아 줄 테니 들고 가.”


마루문을 나서는 문비와 라한을 내앞댁이 붙잡아 세우려는데 흰돌댁이 내앞댁의 팔을 잡아당겼다.

“젊어서 밤눈들도 밝을 텐데 귀찮게시리 손전등은 무슨 손전등.”


“흰돌댁이 말이 맞어. 구름 새로 달도 보이고.”


한실댁까지 흰돌댁을 거들자 내앞댁이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외줄기 도로는 어둑하고 호젓했다. 나란한 걸음은 느긋하고 사푼사푼했다.


“놀라지 마요.”


내앞댁표 수제 막걸리 한 사발에 살짝 몽롱해진 문비가 속삭였다. 라한이 ‘뭘요?’ 하고 묻기도 전에 문비가 라한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보송하면서 굳건했다. 달은 구름과 구름 사이를 건너다니고, 두 젊은 손과 손으로도 달만큼이나 은은하고 아득한 감각이 건너다녔다.


“저기 좀 봐요. 반딧불이에요.”


라한이 가리키는 후미진 기슭에서 파르란 빛 하나가 완만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다녔다.


“올여름 첫 반딧불이네요.”


말하고 나서 문비는 길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 엄마가 한 번씩 읊조리곤 하던 사설이 생각나 명치끝이 뭉클거렸다.


살다 보면 단 한 번뿐인 계절을 만날 때가 있다 했다. 세상의 계절이 아닌 정서의 계절. 눈앞의 꽃이 져도 꺾이지 않는.


문비는 자신이 그 계절에 들어섰음을 느꼈다. 그러자 오로라 가이드였던 토니에가 한 말도 떠올랐다. ‘결국에는 다 같은 데로 이어지는 것들이에요. 너무 아름다운 것, 너무 슬픈 것, 너무 좋은 것, 너무 아픈 것, 그런 것들…… 눈물에 닿아 있는 것들.’ 이라던.


반딧불이의 빛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 같아 문비는 눈가를 만져 봤다. 눈시울이 찡하기는 했지만 눈물이 난 건 아니었다. 술기운 때문인가, 시야는 아직도 흐렸다.


“놀라지 마요.”


잡은 손을 당기며 이번엔 라한이 말했다. 사실 문비는 놀랄 준비가 돼 있었다.


그의 얼굴이 어스름을 헤치고 가까이 내려오는 걸 보는 문비의 속눈썹이 조금 떨렸다. 입술이 입술에 닿기 전에, 떨리던 속눈썹이 닫혔다. 라한의 한 팔이 문비의 어깨를 감쌌고 두 입술은 천천히 그리고 가만가만, 몇 번인가 고쳐 맞물렸다.


반딧불이가 자취를 감췄을 무렵 두 사람은 다시 달빛 어슴푸레한 길을 걸었다. 아까 잡은 손은 그대로인 채로, 반소매 아래로 드러난 맨팔을 가끔 스치면서.


라한은 문비를 현관 앞까지 바래다줬다. 그는 문비의 이마와 뺨으로 내려온 머리칼을 세심한 손길로 가지런히 쓸어 주고 인사했다.


“들어가 쉬어요.”


“가는 거 보고요.”


“문비씨 먼저 들어가요.”


“싫어요. 라한씨 가는 거 여기서 보고 있을래요. 그러고 싶어요.”


다정한 실랑이가 이어졌다.


“고집 센 사람이었구나.”


졌다는 미소를 띠고 라한이 한 발 물러섰다. 뒷걸음으로 저만치 갔을 때 문비가 외쳤다.


“나, 내일 새벽에 듣고 싶은 곡 있어요. 바이올린 연주.”


“뭔데요, 듣고 싶은 곡이?”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3악장. 가능해요?”


일전에 제목을 알고 나서 검색을 해 봤기에 이제 문비도 곡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라한은 대답하지 않고 딴전을 부리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문비가 저 곡을 지정한 것이 우연도 무작위도 아니라는 직감이 선명해서. 그녀의 의도가 귀엽고도 명징해서.


문비는 라한이 자기 집 마당에 도착해서 손을 흔드는 걸 보고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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