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대화

by 화진


척추장애로 등이 굽고 체격이 왜소한 은성에게 학교는 힘든 곳이었다. 나날이 심해지는 조롱과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중학교 때 제도권 교육에서 이탈했다. 고교 졸업 학력까지는 검정고시로 취득했고 대학은 사이버대학교를 다녔다.


그러는 동안 초등학교 시절에 친했던 아이들과도 차츰 멀어졌고 끝내 단절에 이르렀다. 그 애들과 자신을 연결하는 끈이 조금씩 가늘어지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뚝 끊겨 버리는 걸 지켜보면서 은성은 슬펐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관계라는 이름의 끈은 두발자전거와 같아서 한쪽 바퀴로만 끌고 갈 순 없는 거였다.


“문비씨.”


방금 전까지 아이처럼 천진했던 은성의 얼굴에 특유의 진중한 분위기가 돌아왔다.


“네, 언니.”


“우리, 친구지?”


문비가 웃음 지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은성이 따라서 미소했는데 기쁨과 서글픔이 절묘하게 섞여 있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삶에서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할 것의 목록을 너무 일찍 확정해 버린 사람의 미소였다.


“있지, 우리 언니는 내가 현실감이 부족하대. 이런 순정만화 같은 거나 보고 모으고 그런다고. 틀린 말이 아닌 거 알지만, 나는 이런 내가 싫지 않아. 그런데.”


부모님과 할머니의 걱정이나 바람은 무시한 채 너무 자기 생각만 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계속 자신이 좋은 대로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요사이 은성의 심경은 복잡했다.


“나 얼마 전에 집에 가 있다 왔잖아. 실은 그때 선을 봤거든. 할머니 권유로.”


“네에. 그 일로 고민이 생긴 거죠? 언니 마음이랑 주변 상황 사이에서.”


아닌 게 아니라 은성은 고민을 털어놓을 누군가가 필요했다. 편안하고 친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객관적일 수 있는 누군가. 말하자면 지금 은성이 필요로 하는 건 여자들끼리의 내밀한 대화였다.


“맞아. 실은 선 본 그 사람은 이 결혼을 했으면 한 대.”


그를 소개한 사람은 그가 다니는 회사의 임원으로 은성의 할머니와 약간의 친분이 있었다. 은성의 장애가 유전과 무관하게 어릴 때의 사고로 생긴 것이라는 사실과, 은성과의 결혼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그는 미리 알고 선 자리에 나왔다.


“언니가 좋대요? 그렇담 사람의 진가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있단 얘긴데.”


은성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하게 말하더라. 나를 보고 반한 건 아니지만 내가 싫지도 않다고. 그 사람, 가진 게 너무 없어서 지금의 위치까지 오는데 많이 힘들었대. 우리처럼 이렇게 만나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대. 서로 존중하고 노력하면서 살다 보면 정도 들 거라고.”


“언니는 그 사람 어떤데요?”


“나를 좋아하는 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해 준 것이며, 가족들 얘기랑 시골집에서 기르는 동물들 얘기할 때의 표정이며,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은 들어.”


그래서 은성은 고민스러웠다. 자신의 외모로는 이 정도의 사람을 만날 기회조차 다시는 없을지 모른다고. 그러니 이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어른스러운 결정일지 모른다고.


“생각 말고 마음이요. 언니 마음이요. 그 사람이랑 그러니까…… 스킨십 같은 거…….”


역시, 여자들끼리 통하는 말이 있는 법이었다. 문비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실은 그게 문제야. 상상도 못하겠어.”


화들짝 고개를 흔들면서 은성은 뺨을 붉혔다. 사실은 아까 먼발치에서 라한과 문비를 봤었다. 정확히는 라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섰던 문비를. 그러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은성은 부러워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담 그 사람은 아니에요.”


“그거야 문비씨는 언제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입장이니까…….”


“제가 그렇다면 언니도 그래요. 언니는 맑고 진실한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 만나 사랑할 자격 충분해요. 벌써부터 포기하는 건 언니 스스로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문비의 말은 부드럽고 단호했다.


“정말…… 그럴까?”


은성은 어쩌면 방금 문비가 한 말이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혼란했던 머릿속이 웬만큼 정돈됐다.


“그럼요.”


“고마워, 문비씨. 여러 가지로.”


기포가 톡톡 터지는 에이드를 이제야 은성은 시원하게 꿀꺽꿀꺽 마셨다. 다시 가볍고 환해진 은성이 동화에서 튀어나온 꼬마 요정 같아서 문비의 기분도 밝아졌다.


*


이마의 땀을 훔치며 문비는 냇가 가까운 산기슭 눈 시린 녹음 속으로 들어갔다. 냇물을 기준으로 이쪽의 산수국은 푸른색, 저쪽의 산수국은 분홍색이었다. 문비는 양쪽을 오가며 두 색깔의 수국을 다 디지털카메라에 담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남기고, 채집을 했다.


남교수는 산수국을 누이동생 꽃이라고 불렀다. 어려서 원인 모르게 시름시름 앓다 죽은 누이동생이 여름이면 늘 산수국 화관을 만들어 달라고 졸랐었다 했다. 쪼그만 녀석이 취향이 확고하여 꼭 푸른 꽃 분홍 꽃 한 송이씩 번갈아 엮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추억하면서 남교수는 먼 하늘을 쳐다봤더랬다.


괜스레 애잔해진 마음에 문비는 에코백을 내려놓고 앉아 산수국과 칡넝쿨로 화관을 만들어 본다. 남교수와 의논해 볼 일이지만 산수국은 사연이 사연이니 만큼 화관 그림도 한 컷 넣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별장 서재로 돌아와 표본을 정리한 문비는 화관부터 그리기로 하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낭랑하지만 귀가 따갑지 않은 참매미 소리가 백색 소음으로 깔리고, 열어 놓은 창문으로는 열기 품은 풀냄새가 들어와 선풍기 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쳐갔다. 엄마 생각이 안 나는 건 아니지만 평화롭고 담담한 오후였다.


스케치가 거의 끝나갈 무렵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눈이 동그래진 문비가 머리를 갸웃하면서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