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열려 있어야

by 화진


“여보세요. 내다, 내앞댁이.”


전화가 연결됐다 싶으면 상대가 ‘여보세요.’ 할 틈도 없이 먼저 자신을 밝히는 건, 알 사람은 다 아는 내앞댁의 습관이었다.


그리고 동네의 세 할머니들은 서로를 부를 때나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택호를 이름처럼 취급하여 끝에다 ‘이’를 붙여 말하곤 한다. 내앞댁이, 흰돌댁이, 한실댁이, 이런 식으로.


“네, 할머니. 말씀하세요.”


“안 바쁘면 우리 집으로 좀 내려오너라. 상의할 일이 좀 있다.”


목소리가 어둡지는 않아서 걱정할 일은 아니겠구나 안심했지만 좀 의외의 호출이긴 했다. 문비로서는 내앞댁과 자신이 마주앉아 상의할 일이 도무지 없어 보이기 때문에.


“지금 갈까요?”


“오냐, 끊는다.”


용건만 간단히 오간 통화가 끝나고 문비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종일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었기에 한여름 늦은 오후 치고 더위는 맹렬하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친 숲에서 때마침 불어오는 저녁바람의 덕도 없다고는 못할 테다.


산악 지대라 여름에도 일교차가 제법 나는 이곳에는 열대야가 없었다. 한낮의 열기는 뜨겁지만 해가 지고 밤이 들면 공기는 적당히 식는다. 시냇물은 언제나 소스라치게 차갑다.


외지 사람들은 여름 한 철은 살기 좋은 곳이라 하고, 동네 주민들은 그건 모르는 소리라고, 알고 보면 사시사철 살기 좋은 곳이라 했다. 문비는 외지 사람이지만 동네 주민들과 의견을 같이 했다.


도로로 내려가기 위해 징검돌 깔린 샛길을 걷는데 라한과 깨금이가 마당을 지나 돌계단 길을 내려오는 게 보였다. 문비는 다리가 있는 곳에서 기다렸다.


“혹시 내앞댁 할머니네 가는 거예요?”


깨금이의 리드줄을 짧게 잡은 라한이 몇 걸음 앞까지 왔을 때 문비가 물었다.


“네. 문비씨도요?”


내앞댁이 먼저 찾은 건 은성이었으나 은성이 본가에 가고 없다는 말에 그럼 라한이라도 와야겠다고 했던 것이다.


“네. 상의하실 일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뭘 상의하시겠다는 건지 도무지 짚이는 것이 없다는, 같은 빛깔의 의아함이 두 사람의 눈빛을 스쳐갔다.


“저 혼자 가는 줄 알고 깨금이하고 같이 나왔거든요.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깨금이는 집에다 두고 올게요.”


제 이름이 나오자 라한을 올려다보는 깨금이의 얼굴에 산책에 대한 명랑한 기대가 가득했다. 문비는 자신 때문에 집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깨금이에게 미안했다.


“깨금아.”


문비가 부르니 깨금이가 돌아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문비는 미안함을 발판 삼아 깨금이를 향한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심호흡을 하고 깨금이에게로 걸었다. 라한이 깨금이 옆에 쪼그려 앉아 깨금이를 살짝 안고 말했다.


“깨금아. 문비 언니가 깨금이 쓰다듬어 주려나 보다. 얌전하게 있자.”


날씬날씬 흰 손이 느리고 느리게 움직여 살며시 깨금이의 머리에 얹혔다. 깨금이는 웃는 눈으로 문비를 응시했고, 문비는 생각지도 못했던 부드러움을 간직한 따스한 감촉에 기분 좋게 놀랐다.


결국 개와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걸 문비는 깨달았다. 교감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지킬 것을 지키며 다가서야 한다는 걸. 무엇보다 먼저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걸.


“깨금이 산책 못 가게 된 거, 언니가 미안해.”


깨금이는 가만히 앉은 채로 꼬리만 설렁 한 번 움직였다.


라한이 깨금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오는 동안 문비의 머릿속에 불현듯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만났던 안내견이 떠올랐다.


개들이 안내견이 되는 과정에 자의적인 선택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사람에 의해 선택되고 사람의 의도대로 훈련 받고, 그 훈련을 소화할 수 있는 영민함과 유순함과 인내력이 있는 개들만이 안내견이 되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문비는 그 안내견의 눈빛에 헌신 어린 사명감 같은 것이 담겨 있었던 것만 같다. 착각이거나 사후적 미화인 줄은 알지만. 개를 의지하여 계단을 내려가는 시각장애인의 표정은 또 얼마나 편안하고 신뢰감에 차 있었던가.


회상하다가 문비는 가슴이 뜨끔했다. 혹시 그 동행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게 결국 자신과는 무관한 장면이라 여겼기 때문은 아닌지. 그 장면에서 헌신이나 아름다움 그런 가치들을 떠올릴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워서 특별한 기억으로 남지 않았어야 옳은 게 아닌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골똘하게 생각하던 문비가 화들짝 옆을 봤다. 언제 돌아왔는지 곁에 앉아 있던 라한이 몸을 일으켰다. 문비도 일어나 걸음을 내디뎠다.


“생각 안 하면 아무 일도 아닌데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려운 문제가 되는 생각이요.”


“어렵네요. 그리고 더 궁금해지는데요?”


“이렇게 시작해 볼게요. 실은 저 점자를 읽을 수 있어요.”


“점자요? 시각장애인들이 손끝으로 더듬어서 읽는 글자를요?”


“네, 물론 전 더듬어서 읽는 촉독은 해 본적 없고 기호와 규칙을 외우고 있어서 눈으로 보고 아는 거지만요. 엄마가 점역 봉사를 오래 하셨었어요.”


문비가 엄마 얘기와 김소현 복지사와 안내견을 동반했던 애젊은 시각장애인 여성에 대해 라한에게 두런두런 들려주다 보니 어느새 내앞댁의 집이 코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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