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새벽 문비는 섬세하게 흐르는 바이올린 선율을 아련하게 들으며 잠을 깼고, 드라마틱한 부분을 지나 포르테시시모의 격렬한 연주가 이어지다 마침내 조용히 곡이 끝났을 때야 자신의 뺨이 젖어 있음을 알았고, 고요하고 어스레한 새벽빛에 잠겨서 그 눈물의 근원을 오래 생각해봤지만, 알 길이 없었다.
아름다움인지, 슬픔인지, 통증인지, 환희인지, 또 다른 무엇인지.
다만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이 있었다. 이 눈물의 근원이 문비를 지키리라는 것. 때때로 엄습하는 삶의 음영으로부터.
어떤 일들은 직접 당해 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법이라는 걸 문비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서야 겨우 체득할 수 있었다. 막을 수 없다는 걸. 그저 겪어내는 수밖에 없다는 걸.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라는 걸. 그 일 이후의 모든 삶을 통해.
엄마의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경험은 허락도 없이 문비의 마음자리에 한 공간 차지하고 들어앉았고, 슬픔은 동맥과 정맥과 모세혈관을 따라 흘러다녔다.
밤중에 불현듯 잠에서 깨어 어둠을 마주할 때, 엄마의 죽음은 문비의 마음에서 빠져나와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면 혈관 속 슬픔이 거기에 호응하여 무수한 바늘처럼 파닥거렸다. 이제 그런 밤이 오면 문비는 지금 뺨을 적시는 이 눈물을, 이 눈물의 근원을 생각할 것이다.
이 눈물의 환함으로 어두운 밤을 무사히 건널 것이다.
*
한실댁에게서 집 뒤란 기슭에 있는 더덕이 꽃봉오리를 맺었다는 전화를 받은 문비는 서둘러 한실댁네로 갔다.
“잘 오너라.”
어서 오라는 말에서 어서 대신 잘을 즐겨 쓰는 건 한실댁 할머니의 말버릇이다. 문비는 어서 오라는 말보다 잘 오라는 말이 더 정겨웠다. 잘 오라는 그 말, 마른 땅만 디디면서 고이고이 오라는 말 같기도 하고, 허튼 데 눈 돌리지 말고 옳은 길로만 오라는 말 같기도 해서.
“네. 점심은 드셨어요?”
“시간이 벌써 두 시가 넘었는데 먹었지. 풋고추하고 상추 따다가. 니는?”
요사이 세 노파는 오후 두 시에서 네 시 사이에는 밭일을 나가지 않고 집에서 휴식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될 때를 즈음하여 아랫마을에 사는 이장이 와서 단단히 주의를 주고 간 사항이었다. 이장은 일부러 문비와 라한을 찾아와 당부하기도 했다. 한 번씩 살펴도 봐 주고 잔소리도 해 달라고.
“저도 먹었어요. 설기는 점심 먹느라 바빠서 제가 오든 말든 안중에도 없네요.”
설기는 마당 한편에 있는 측백나무 그늘에 엎드려 측백나무 잎을 야금야금 씹고 있었다. 한실댁의 살뜰한 보살핌 덕분에 설기는 오늘도 눈처럼 희고 얼룩말처럼 건강하다. 측백나무 이파리는 녹색의 노티드레이스처럼 하늘거리며 설기의 입속으로 사라진다.
“자, 더덕 꽃망울 보러 가 보자.”
한실댁이 마루에서 내려왔다.
“뭐가 그리 급해서 저 혼자 이렇게 꽃망울을 맺었나 몰라. 아직 더덕 꽃 피기엔 이르구만.”
사진을 찍는 문비의 옆에서 한실댁이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뒤란 기슭 여기저기에 풀이나 나무를 감고 올라온 더덕 줄기가 많은데 맺힌 꽃망울은 아직 달랑 하나였다. 이 더덕 줄기들은 한실댁이 산더덕의 씨앗을 받아다 심어 몇 년을 묵힌 것이라 향이 진동을 하게 짙었다.
남교수가 이메일로 보낸 원고 가운데 더덕 꽃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있었다. 그가 어린 시절 집 주위에 자라는 더덕의 꽃망울을 손으로 톡톡 터뜨리고 다니다가 모친에게 꾸중을 들은 일화였다.
더덕 꽃의 망울이 손끝에서 뽁 하고 터질 때의 느낌이 요즘으로 치면 에어캡 터뜨리는 느낌에 가까워서 꽤나 재미났다고. 그러나 꽃망울을 인위적으로 터뜨리면 그대로 못 쓰게 돼 버려 씨앗을 얻을 수 없다고.
꽃망울이 자연스레 꽃을 피워야 씨앗을 품는 이치를 모친에게 들어 알고 나서는 재미를 위해 더덕 꽃망울을 터뜨리는 장난은 다시 하지 않았다고 남교수는 원고에 적었다. 자신의 장난이 꽃망울에게서 가능성을, 미래를 빼앗는 짓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고.
꽃망울이 꼭 통통한 연둣빛 주머니같이 생겼으니 그걸 본 아이로서는 호기심이 생기긴 생기겠다 싶었다. 터뜨려 보고 싶은. 터뜨리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아닌 게 아니라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문비도 그런 호기심이 슬몃 들지 않는 게 아니었다.
“꽃 피면 그때 또 알려 주랴?”
“네. 여러 송이 피면 알려 주세요. 꽃봉오리는 사진만 찍었지만 꽃은 채집해서 표본도 만들려고요.”
“더덕은? 필요하면 당장이라도 한 뿌리 캐 주고.”
“더덕은 내앞댁 할머니께서 어제 산에서 캐 오신 거 있다고 보여 주신댔어요.”
“내일 장에 간다더만 팔아서 돈 살 모양이지.”
문비가 배시시 웃었다. 그 더덕의 용도를 한실댁 혼자만 모른다. 어제 내앞댁이 캔 산더덕은 모레로 성큼 다가온 한실댁의 희수연 뒤풀이 술안주로 나올 것이었다.
안마당으로 돌아가니 내앞댁과 흰돌댁이 와 있었다. 한실댁 몰래 세 사람은 은밀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한실댁이는 아무것도 눈치 못 챘겠지? 네 전혀 모르시는 게 확실해요.
흰돌댁은 한실댁과 함께 마루로 올라가고 내앞댁은 문비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 더덕을 보여줬다. 문비를 위해 일부러 한 뿌리는 줄기와 잎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캐다가 장독대 옆 그늘진 땅에 묻어 놓았던 것이다.
한실댁의 희수연 준비 상황에 대한 말들을 주고받는 내앞댁과 문비의 소곤거림에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이 찰랑거렸다. 상차림은 형식이니까 간소하게 할 계획이었다. 중요한 건 뒤풀이 즉 저녁 식사와 술상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문비는 김소현 복지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길 가의 산그늘에 앉아 제법 긴 통화를 했다. 얼마 전 문비가 전화해서 부탁한 일이 있었다. 아버지와 엄마의 대학 시절, 구체적으로는 둘의 연애사를 알아봐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