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기가 생겼다는 걸

by 화진


유아차에 탄 아기를 보고 있던 꽃집 주인 남자가 일어나 문비의 앞으로 왔다. 문비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니 주인 남자가 ‘아아, 예약 꽃이요?’ 하면서 전면이 투명한 꽃냉장고를 가리켰다. 미리미리 꽃집을 검색해서 전화로 주문해 놓은 꽃들이 문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브 피아제 장미는 핑크하고 크림 컬러 맞죠?”


1982년 제네바 국제 장미 콩쿨 우승 품종인 이브 피아제 로즈의 원래 명칭은 로즈 피오니였으나 장미 재배사 알랭 메이안이 피아제 사 창립자의 4대손이면서 당 대회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이브 피아제에게 헌사하면서 이브 피아제 로즈가 됐다. 이브 피아제는 장미 사랑으로도 유명한 셀럽이다.


“네, 저 두 가지 컬러 맞아요.”


꽃집 주인이 꽃냉장고에서 이브 피아제 장미를 꺼냈다. 작약을 닮은 화형, 그라데이션으로 색이 짙어지면서 프릴처럼 말리는 꽃잎 가장자리. 귀한 자태와 향수보다 고혹적으로 번지는 향에 문비는 만족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은 이 꽃집 개업 이래로 이브 피아제 콕 집어서 찾는 손님은 처음이었어요. 게다가 핑크만이 아니라 크림 컬러까지. 일정하게 수입되는 꽃이 아니라서 못 구하면 어쩌나 마음깨나 졸였는데 운 좋게도 두 종을 다 구했네요.”


꽃집 주인과 문비가 꽃을 두고 주문 사항을 확인하는 동안 라한은 유모차 안 아기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에 마음을 빼앗겼다.


“카네이션은 홍차라떼 빛깔을 닮은 빈티지한 색감, 갈색 아이비, 하얀 리시안셔스, 아스틸베도 흰색으로, 그리고 부바르디아……. 아, 그린 소재나 열매 소재 같은 건 따로 필요 없으시고요?”


“네. 제가 요즘 그런 소재들이 지천인 곳에서 살고 있어서요.”


“좋은 곳에 사시네요.”


주인 남자는 꽃을 물 처리하여 포장하고 문비는 라한을 바라봤다.


저 사람, 아기를 좋아하는구나.


아기를 어르는 라한의 등만 봐도 문비는 그의 표정을 알 수 있었다. 사랑스럽다는 마음이 뚝뚝 흐르는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을 그 때문에 문비의 눈에도 아기가 들어왔다.


아직 성긴 머리숱 아래 동그란 머리와 세상에 악의라는 것도 존재하는 줄을 모르는 무구한 검은 눈과 까르륵거릴 때마다 드러나는 치아 없는 분홍 잇몸과 나뭇잎처럼 살랑거리는 보드라운 두 손. 아기는 목질화하기 전의 어린 나무를 닮았다. 연하고, 파릇하고, 환한.


“세상 모든 아기들은 아기라는 그 자체로 너무 예쁘잖아요.”


다가간 문비에게 라한이 속삭였다. 아기들에게 특별한 관심이나 애정을 품어 본 적 없이 무심했던 문비는 처음으로 아기라는 존재를 향한 간지러운 귀여움을 느낀다.


“이 이마 좀 봐요. 시원하고 반듯한 것이 어진 사람으로 자라겠어요.”


“그러게요.”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라한의 전망을 문비는 흔쾌히 긍정했다. 저런 덕담이라면 씨앗이 돼도 좋을 말이니까.

아직 말귀가 트이지 않았을 아기가 저한테 좋은 말이라는 걸 안다는 듯이 방싯 웃었다. 아랫잇몸 가운데에서 작고 투명한 흔적 둘이 반짝였다. 그것이 첫 배냇니의 머리라는 걸 깨닫는 순간 문비는 무심코 ‘까꿍.’하며 아기를 향해 활짝 웃고 말았다.


“꽃으로 케이크를 만든단 말이죠?”


꽃묶음들을 들고 꽃집을 나서면서 묻는 라한에게 문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플라워 케이크라고도 부르고 생화 케이크라고도 불러요. 플로랄폼에다 꽃꽂이를 해서 케이크 모양을 내는 건데 잘만 만들면 진짜 케이크 안 부러워요. 한실댁 할머니, 빵 종류 별로 안 좋아하시고 꽃은 좋아하시니까 플라워 케이크가 좋겠다 생각했죠.”


플라워 케이크는 꽤 여러 날 동안 한실댁의 방을 아름다운 빛깔과 모양, 싱그러운 향기로 채워줄 것이다.

“이를테면 시각과 후각으로 맛보는 케이크네요.”


돌아오는 길, 차 안은 완전히 이브 피아제 장미의 영향권이었다. 매혹적인 장미향 속에서 문비와 라한은 자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각각 모르는 평행선이었던 자신들의 삶에 바야흐로 기울기가 생겼다는 걸. 두 기울기가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걸. 맞닿아 예각을 이루는 끝이 되거나, 교차해 지나가 버리는 끝이 되거나 하겠지만 다시 무관해질 수는 없다는 걸.


*


컨디셔닝 작업으로 물올림을 한 꽃들을 거실에 늘어놓은 다음 문비는 역시 물을 충분히 흡수시킨 플로랄폼을 꺼내 왔다. 최상단의 중앙을 장식할 분홍 이브 피아제 장미를 꽂는 것을 시작으로 플라워 케이크 작업에 들어갔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열심히 꽂꽂이를 한 끝에 커다한 하트형의 케이크가 먹음직하면서도 청초한 자태를 드러냈다.


빈티지한 색감의 카네이션으로 얼그레이 케이크를 흉내내고 한 층은 갈색 아이비를 넣어 초코 크런치, 또 한 층은 크림 빛깔 이브 피아제 장미로 바닐라크림 느낌을 살렸다. 맨 위층은 리시안셔스로 화이트 초콜릿 슬라이스 흩뿌린 모양을 냈다.


한쪽 모서리에는 흰 아스틸베 몇 개를 배치하여 단조로움을 피하고, 흰 리시안셔스의 가운데는 핑크 이브 피아제 장미 몇 송이와 푸르누런 아그베 열매 그리고 붉은 산딸기와 푸른 잎이 달린 가지로 장식했다.


완성된 케이크를 투명한 상자에 막 넣으려는데 휴대 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는 문비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할미다. 오늘은 전화 한 번 해주겠지, 내일은 걸겠지, 기다리고 기다려도 소식이 없기에 할미가 걸었다. 야속한 것.”


“죄송해요.”


함께 부대낀 세월이 없는데도 유전자를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너무나도 편안하고 살갑게 구는 할머니가 문비는 내심 불편했고, 혈육을 불편해 하는 스스로가 또 적잖이 못마땅했다.


싫다. 이런 복잡하고 껄끄러운 심정의 나.


“할미는 괜찮다. 할미는 괜찮아. 하지만 네가 네 아비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다. 네 아비는 그 지경을 하고서도…….”


누군가 버럭 내지르는 ‘어머니!’ 소리가 할머니의 말을 끊었다. 슬픔과 노기가 응어리진 고함이었다. ‘그러지 마시라고 제가 그렇게 부탁을 드렸…….’ 하는 말도 들렸다. 아까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애원조의 말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아버지임을 문비는 직감했다. 가슴이 터질 듯이 쿵쾅대고 팔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여보…… 세요?”


문비가 조심스럽게 불러 봤다. 당황스러웠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할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응답할지도 모른다는.


이미 통화가 끊어졌음을 확인한 문비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허탈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이전 06화멋쩍지만 감미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