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수 없이 둘만 일어났다. 라한과 문비가 마당을 나가 저만치 멀어질 무렵 멍석 위의 사람들은 소리 죽여 웃었다. 은성도 말짱한 얼굴로 돌아와 의뭉스런 미소를 띠고는 술잔을 다시 들었다.
뒤에 남은 사람들의 표정과 마음이 색 고운 훈풍이 되어 등을 다독여주는 걸 알 리 없는 두 사람이 달빛 속을 걸었다. 보름달하고도 슈퍼문이었다. 달은 크고도 가까워 긴 그물채만 있으면 감 따듯 따 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보름달이, 슈퍼문이라는 것이, 이렇게 밝은 줄을 문비도 라한도 처음 알았다. 다른 인공의 빛 없이 오롯이 그 달 아래를 걸어 봐야만 알 수 있는 밝음이었다. 달빛 때문에 밤하늘에 푸른빛이 번하고 구름은 희었다. 별들은 가볍고 청아했다. 산과 풀밭과 길이 낱낱이 구분됐다.
“나, 좀 취했나 봐요.”
묶었던 머리를 풀던 문비가 말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찌푸리더니 양팔을 활짝 들고 일자걸음을 걸어 본다. 비틀거리지는 않았지만 그러기 위해 속도가 느려졌다. 보고 있던 라한이 문비의 앞을 막아섰다.
“업혀요.”
자세를 낮춘 라한을 문비는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약간의 조바심만 줄 정도로 지체하다 넓고 반듯한 등에 슬그머니 업혔다. 그에게서 산뜻하고 시원한 향이 났다. 구과식물다운 향이었다.
“남자 등에 처음 업혀 봐요.”
라한은 잠시 기분이 좋았다가 이내 먹먹해졌다. 문비가 아버지 없이 자라지 않았다면 저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두 아버지를 거쳐 자란 남자가 아버지 없이 자란 여자를 업고 가면서 생각했다. 아버지란, 하나면 충분한 존재라고. 그렇지만 때로는 둘인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런데 그 존재가 완전히 도려내어진 성장기를 보낸다는 게 어떤 건지는…… 모르겠다고.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모르는 일이겠다고. 남들이 알아줄 수 없는 결핍의 페이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건 외로운 일이겠다고.
따듯한 어깨에 턱을 기대고 문비는 재구성해 보려 애썼다. 어린 시절을. 걷기 싫다고 꾀를 부려 아버지 등에 업혀 가기도 하는 꼬맹이 문비를. 그러다 머리를 저었다. 취기가 불러온 치기라고. 부질없다고.
“원한다면 내가 매일이라도 업어 줄게요.”
“정말로 확 매일 업어달라고 할까 보다.”
“기꺼이.”
그녀의 머리칼이 찰랑찰랑 그의 한쪽 뺨을 간지럽힐 때마다 밤의 숲 내음이 다가왔다 멀어졌다 한다.
“아니, 안 그럴래요.”
“왜요? 나 빈말 아닌데.”
“귀찮고 싫증나서 도망갈까 봐.”
그의 목을 느슨하게 감고 있던 그녀의 팔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문비씨나 말없이 사라지고 그런 거 하지 마시지?”
못나고 어리석은 일인 줄 알면서도 이상하게 그날의 불안이 라한에게는 쉬이 극복되지 않았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스스로를 안심시켜 봐도 그 결여의 심연은 때때로 라한을 선득한 두려움에 빠트리곤 했다.
“이 사람 은근 뒤끝 있네. 재고해 봐야 하나?”
“재고 그런 거 하지 마요. 이제부터 쿨한 척 할 테니.”
“척?”
“척만.”
“그래요. 척이 좋겠어.”
한 여자의 말없는 사라짐에 정녕 아무렇지도 않은 한 남자가 있다면 그 남자에게 그 여자는 대체 불가의 단 한 여자가 아니라는 뜻이니까.
“힘들지 않아요?”
“이대로 풀코스 마라톤도 뛸 수 있는데.”
“허세.”
라한이 냅다 달렸다. 달빛이 두 사람의 옷자락에서 물결쳤다.
“그만. 알았으니 그만 뛰어요.”
말마디 사이사이로 웃음 조각이 튀었다. 그녀가 웃어서 좋았다. 그녀를 웃게 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게 라한은 좋았다.
숨차게 달리는 그에게 그녀는 달이고 별이고 하늘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중력이 없었다. 그녀를 따라 그도 한없이 가벼워져 허공을 디디며 달리는 듯했다.
*
칠감을 조제하고 배합하는 과정이나 칠 작업을 라한은 언제나 새벽의 첫 순서에 두었다. 오늘은 이번에 완성된 바이올린에 초벌칠을 시작하는 날이다. 칠은 오늘 한 겹, 내일 한 겹 이런 식으로 여러 번에 걸쳐 덧바른다.
칠감은 전적으로 자연에서 온 천연재료로 만든다. 호박수지, 다마르, 산다락, 알로에, 백단향 기타 등등의 재료를 혼합하는 법은 현악기 장인마다 각각 다르고, 비밀스럽게 취급됐다.
라한은 스승 벤야민에게서 전수받은 혼합법을 기본으로 자신만의 칠감을 만들어내기 위한 응용과 연구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칠은 악기를 보호하는 내구성을 부여하고 색감을 내는데, 라한은 거기에 더해 칠이 소리와도 밀접하다고 믿는 제작가에 속했다. 그러니까 좋은 칠이 나뭇결을 안정시켜 더 좋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고.
칠감을 붓에 묻혀 바이올린에 칠하니 나무의 결이 진하게 두드러졌다. 세밀한 붓질로 칠감을 얇게 바르면서 라한은 문비를 생각했다. 문비가 나무라면 자신은 가장 좋은 칠감으로 그녀의 삶에 스미고 싶다고.
최근 라한은 작업시간을 조금 조정했다. 문비가 식물을 보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무렵으로 휴식 시간을 맞춘 것이다. 대략 오전 열한 시 즈음이었다.
라한은 밖으로 나가 깨금이에게 목줄을 채우고 리드줄을 연결했다. 영리한 깨금이는 앞장서서 돌계단 길을 내려간다. 둘이서 다리목을 서성이다 보면 문비가 온다는 걸 깨금이도 아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