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한은 나무에 기대어 책을 읽고 깨금이는 나무 그늘에서 흙냄새를 맡거나 풀을 씹어 보거나 나비를 쫓아다녔다. 오래지 않아 저만치 문비가 모습을 드러내고 깨금이가 반갑다고 부드럽게 한 번 짖고는 늘 해왔던 것처럼 제 자리에 점잖게 앉았다.
“안녕, 깨금아?”
문비가 다가와 깨금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깨금이가 혀를 내민 채 씨익 웃었다.
“깨금이하고 친해졌다고 이젠 대 놓고 사람이 뒷전이네.”
불평하는 라한의 팔을 문비가 주먹으로 툭 쳤다. 그러나 그 주먹은 되돌아가지 못하고 라한의 손에 붙잡혔다. 문비가 짐짓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으나 라한은 놓지 않았다.
“눈 감아 봐요.”
“싫어요.”
“잠깐이면 돼요. 감아 봐요.”
“곤란한데?”
문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라한은 웃음을 참고 은밀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어서요.”
“감았다 바로 뜰 거예요.”
“좋으실 대로.”
“앗, 차가워.”
눈을 번쩍 뜬 문비의 손안에 조그만 수박 모양의 떡이 들어 있었다. 떡은 먹기 알맞을 만큼 말랑하게 해동돼 있었고, 더운 날 반가울 만큼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
“아아, 수박설기였구나.”
비닐에 싸인 떡으로 이마를 식히며 문비가 중얼거렸다.
“뭘 기대했는데요?”
라한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기대는 무슨 기대를.”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펄쩍 뛰듯이 일축한 문비가 수박떡의 비닐을 벗겨 반쯤 베어 물고는 나머지 반쪽으로 라한의 입을 막아 버렸다. 달콤하고 상큼하고 시원한 시간이었다.
문비는 생각했다. 삶을 지난함이나 권태로부터 구원하는 건 결국 이렇게 사소하지만 안온한 서정으로 물든 장면들일지 모른다고.
“오늘은 뭐 보고 왔어요?”
“머루요. 아직 다 익진 않았더라고요. 은성 언니는 뭐 하세요?”
“베갯잇 만들 모시를 황토 염색해요.”
은성은 직접 만든 잡다한 소품들을 인터넷에 올려 판매하는 개인사업자였다. 생계가 거기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수입도 신통찮으니 실상 소일거리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은성에게는 소중하고 엄연한 직업이었다. 은성은 얼마가 됐든 매월 그 수입 전액을 세계 어린이들을 구호하는 기관에 기부해 왔다.
“어? 깨금아, 그러지 마!”
문비가 다급하게 외쳤다. 다리 난간에서 볕을 쬐던 작은 도마뱀을 발견하고는 깨금이가 쫓고 있었다. 손가락만 한 도마뱀이 문비와 라한이 있는 쪽으로 도망쳐 왔다. 문비는 재빨리 손을 뻗어 도마뱀을 두 손 안에 가두었다. 라한이 난감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왜 그래요? 도마뱀 무서워요?”
둥글게 마주쳐 도마뱀을 가둔 손을 문비가 라한의 얼굴을 향해 쑥 내밀었다.
“무섭긴요.”
라한은 기겁하여 뒤로 물러났다.
“안 무섭다면서 왜 그래요?”
놀리면서 문비가 한 걸음 다가섰다. 라한이 또 피했다. 신이 나서 자신을 놀리는 문비를 보는 건 즐거운데 문비의 손 안에 든 작은 생명체는 못마땅했다.
“파충류하고 안 친해요. 차라리 맹수를 마주치는 게 낫지. 안 징그러워요?”
“다른 파충류는 몰라도 도마뱀 작은 건 귀여운데.”
라한은 깨금이를 잡고 있고, 문비는 도마뱀을 원래 있던 곳에 놓아줬다. 도마뱀은 반대편으로 도망갔다.
희고 날렵한 승용차 한 대가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가까워지는 흰 차를 향해 깨금이가 짖었다. 경계하는 소리가 아닌 반가움의 소리였다.
문비가 라한을 봤다. 라한은 조금 놀라는 기색이었다. 차는 두 사람의 바로 앞까지 와서 멈췄다. 운전석 창이 내려가고 여자 얼굴이 불쑥 나왔다.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야구 모자를 눌러쓴 여자가 말했다.
“잘 지내고 있었구나, 송라한.”
“연락도 없이 웬일이냐, 서은세?”
“너 보러.”
정작 눈은 문비를 보면서 은세가 대답했다. 문비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은세도 딱 그만큼 턱을 까닥했다.
“황송하네. 차 저쪽에 주차해라.”
라한이 자신의 차 옆 공간을 가리켰다. 은세가 그리로 차를 몰았다.
“이름으로 누군지 짐작했죠? 은성 누나 친동생이고 나와는 동갑이에요. 생일은 내가 좀 더 빠르지만.”
무슨 바람이 불어 갑자기 덜컥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기야 은세는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인물형에 속했다.
“은성 언니랑 닮았어요.”
동그란 눈과 위쪽으로 살짝 올라간 양 입꼬리가 은성과 흡사했지만 은세 쪽이 좀 더 성숙해 보인다고 해야 할지 심각해 보인다고 해야 할지 그런 느낌이었다.
“송라한, 와서 이것 좀 나눠 들자.”
조수석에서 쇼핑백들을 꺼내며 은세가 불렀다.
“와인이랑 샴페인이랑 치즈 그런 것들.”
“네가 다 먹고 가겠네.”
묵직한 쇼핑백들을 받아들면서 라한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려고 가져왔다, 왜?”
은세가 문비에게 보이지 않게 얼굴을 돌리고 소곤소곤 물었다.
“저 여잔 누구? 이 동네 주민이야?”
“아니. 따라 와. 인사 나누고 올라가.”
내키지 않았지만 궁금증 때문에 은세는 라한을 따라 문비에게로 갔다.
“여긴 가문비씨, 일 때문에 저기 저 집에서 지내는 중. 여긴 서은세.”
라한이 중간에서 소개했다.
“은성 언니한테 얘기 들은 적 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은성을 좋아하는 문비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네, 안녕하세요? 근데 이런 산골에서 무슨 일을 하세요?”
은세는 심드렁했지만 문비는 그녀의 그런 성격에 대해서도 은성에게 들은 바 있었기에 오해는 하지 않았다.
“식물학 그림이요. 생태화, 세밀화 그런 거요.”
“아아, 네. 그럼 이만.”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말과 행동을 남기고 은세는 성큼성큼 돌계단 길을 올라갔다. 깨금이가 은세를 따라갔다.
캐주얼한 짧은 반바지와 민소매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그을린 팔다리의 건강미가 문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운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몸태 같았다. 은성과 은세는 얼굴만 닮았지 여러모로 판이한 자매간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저렇게 한결같아요.”
라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름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죠 뭐. 라한씨도 어서 올라가 봐요.”
두 사람은 서로 엷게 웃고 돌아섰다.
바람이 후텁지근하고 뭉근했다. 소나기라도 한 차례 쏟아질 것 같은 여름 한낮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