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소리가 불러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은세가 치는 곡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의 3악장이었다. 살구나무가 바람을 맞아 급하게 날아오르는 새의 날갯짓처럼 부산하게 흔들렸다.
안채 거실의 그랜드피아노는 은성이 들여놓은 것이었다. 은성은 팝 뮤직을 좋아해서 이따금씩 흥이 나면 직접 반주하며 부르곤 했다. 지금 은성은 읍내에 가고 없으니 피아노를 치는 건 은세일 터였다. 은성이 있다 해도 저건 은세의 연주일 수밖에 없었다. 은성은 저렇게 야성적으로 건반을 터치하는 습관이 없다.
중학생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은세의 피아노를 듣는 것은. 좀 녹슬긴 했어도 지난날의 예리하고 힘찬 기교가 어느 정도 배어나는 연주였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은세의 손가락에 실린 조급함과 긴장이었다. 라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광야를 질주하듯 내달리던 피아노 소리가 멎고 이내 은세가 안채 현관을 나와 작업실 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라한은 작업실 문을 열고 기다렸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게으름 피우고 있었나 보네?”
감느라 풀어 내린 긴 머리를 바람에 흩날리며 마당을 지나오던 은세가 타박했다.
“폭풍이 몰아쳐서 말이야.”
은세가 연주한 템페스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엉망이었지 뭐. 피아노는 관리 잘 돼 있더라. 작은 언니가 자주 치나 봐? 요즘도 주로 팝이야?”
“동네 할머니들 영향으로 트롯 가요가 더해졌지.”
“뭐 트롯? 재밌겠네. 저녁때 한 곡 들려 달래야겠다.”
“깨금이는?”
“코 골면서 낮잠 자. 내 템페스트가 걔한텐 자장가로 들리나 봐. 넌 하던 거 해. 나, 없는 듯이 조용하게 구경할게.”
뒷짐을 진 은세가 입을 다물고 작업실 안쪽 공간으로 향하는 걸 잠시 바라보던 라한이 작업대에 앉았다.
앞판을 닫아 바이올린 몸통을 완성한 라한은 흑단으로 된 지판을 잡았다. 손대패로 지판의 둥근 면을 깎고 스크레이퍼로 다듬던 라한이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옆을 보니 은세가 책상에 엉덩이를 기대고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냐?”
스크레이퍼를 놓고 의자를 뒤로 물려 앉은 라한의 눈에 또 다시 의아한 빛이 지나갔다.
“아니, 그냥. 작업하는 모습 좋아 보여서. 역시 사람은 원하는 걸 하면서 살아야 해. 그치?”
“너 뭐 고민 있냐?”
“내가? 있겠니?”
말도 안 된다는 듯 은세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첼리스트가 크로아티아 풀라 아레나에서 밤 콘서트를 하거든. 일단 그걸 볼 거야.”
해 지기 전에 미리 가서 풀라 아레나의 석조 아치들 사이사이로 바다에 석양이 지는 광경부터 감상하는 것이 은세의 계획이었다.
어느 아치 너머에선가 붉은 해가 아드리아해로 몸을 던질 것이다. 머리 위로는 푸른빛과 창백한 빛, 눈앞으로는 낙조가 흘리는 노란빛과 주홍빛이 펼쳐질 것이다.
거기 혼자 서 있는 사람은 막막하겠다고, 너무 아름다운 풍광이 주는 거대한 외로움에 압도될 거라고. 예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은세는 가슴이 시렸다.
“바닷가에 위치한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에서의 밤 콘서트라…… 서은세, 로맨티시스트 맞네. 인정. 야, 솔직히 말해 봐. 혼자 가는 거 맞아?”
“왜? 같이 갈래?”
“그 좋은 곳을 가족끼리? 서은세, 농담 많이 늘었다.”
풀라 아레나의 밤 콘서트라는 말을 듣자마자 생각난 얼굴이 라한에게는 따로 었다. 석조 아치 위로 검푸른 하늘에 보석처럼 떠오른 달을 보며 드보르작의 송 투 더 문을 들으면 세상에서 가장 고혹적인 표정을 지을 사람, 그 여자 문비.
“많이 늘었지.”
창가로 가면서 은세가 중얼거렸다.
“나 독일 가고부터 네가 어머니한테 신경 많이 써 드렸다며? 고맙다, 서은세.”
“당연한 걸 뭘 고맙대. 가족끼리.”
은세가 내다보는 창문 저 멀리 문비가 머무는 별장이 있었다.
“나 사실 피아노 그만둔 거 너 때문이었어.”
피아니스트를 목표로 하던 은세가 돌연 그간 매진해왔던 피아노 대신 취미로 하던 골프로 진로를 변경한 것은 라한과 가족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었다.
“추측은 하고 있었어.”
아버지와 할머니가 크게 놀라기는 했지만 별다른 반대는 하지 않았던 것을 라한도 기억한다.은세의 진로 변경을 어른들이 무리 없이 받아들인 건 골프가 서씨 일가의 사업과 밀접한 분야였기 때문이었다.
라한은 은세가 피아노를 그만둔 것을 일종의 비명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가족 즉 자신과 어머니를 받아들이면서 떠안아야 했던 상처로부터의 비명.
“아니, 네가 짐작하는 그런 이유가 아냐. 정직하게 말하면, 음악적 열등감이었어.”
그때는 아직 라한이 바이올린을 잡고 있던 시절이었다.
“네 바이올린 연주는 특별했어. 내가 죽어라 해도 따라잡지 못할 뭔가가 있더란 말이지.”
나에게 넌 발바닥에 박힌 모래처럼 거슬리는 존재였는데 바이올린을 켜고 있을 때의 넌 무지개였고 불꽃놀이였어. 황홀했달까.
“그래서 내 피아노가 시시해졌던 거야. 하지만 골프는 네가 못하는 것이었지.”
넌 하지 못하는 걸 내가 잘해서 보여주고 싶었어. 단 한 번이라도 네가 나를 선망하는 순간도 있길 바랐어. 그래야 공평하다고 생각했어.
“몰랐어.”
“몰라도 되는 일이었어. 저 집 낙엽송 두 그루 멋지네.”
마당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 품새가 마치 연인이나 부부 같다.
“곧 소나기 올 모양이다.”
“빗방울 벌써 떨어지는데?”
라한이 일어나 은세 옆으로 갔다.
“그러네.”
순식간에 쏴아 하는 소리가 나고 풍경이 젖는다. 건넛집에서 우산을 쓴 문비가 나와 낙엽송 아래 들마루에 널어놓았던 붓들을 거두는 모습이 보인다. 현관 앞에서 문비가 잠깐 이쪽을 건너다본다.
“너 지금 네 눈빛이 어떤지 모르지?”
은세가 팔꿈치로 라한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문비를 향해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