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비늘, 끝내 거머쥘 수 없는

by 화진


“어머, 은세야. 우리 은세 왔네? 이게 웬일이니?”


황토물 들인 모시를 건조대에 널고 있던 은성이 반색했다. 앞치마에 손을 닦고는 은세의 한 손을 잡고 쓰다듬고 흔든다.


“좋은 곳이라고 와 보라며? 작은 언니가.”


위로 은휘와 은성 두 언니가 있는 은세는 말귀가 겨우 트이던 꼬맹이 때부터 두 언니를 꼭 구분해 불렀다. 큰언니, 작은언니.


“그래, 그랬어. 내가 그랬어. 근데 솔직히 정말 올까 싶었거든.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좋긴 좋네. 특히 청정한 공기. 와, 저게 뭐야, 살구가 아직도 남아 있어?”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은세가 살구나무 아래로 갔다. 일전에 은성이 잼을 만들기 위해 살구를 따면서 늦된 것들은 남겨 뒀는데 그것들이 푹 익은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여긴 산속이라 봄여름이 소걸음으로 느긋하게 오니까.”


말하는 라한을 은세가 돌아봤다.


“느긋하게 와서 짧게 빛나고 어느 샌가 자취를 감추는 아름다운 시절, 뭐 그런 거?”


평소의 은세라면 구사하지 않을 어법이었다.


“너 무슨 일 있냐? 어디 아파?”


라한이 반 농담으로 받았다. 라한과 은세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럴지도.”


이마에 손차양을 한 채 살구나무를 올려다보며 은세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태양의 비늘이라 해도 좋을 빛의 파편들이 녹색의 잎과 주황색의 열매 사이사이로 아른거렸다. 삶의 틈새로 언뜻언뜻 찬란한 자락을 내보여 사람을 매혹하는, 그러나 끝내 거머쥘 수 없는 그 무엇처럼.


은세가 나뭇잎 사이로 손을 뻗었다. 빛살은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거나 손 너머에서 따끈했다. 분명히 거기에 있으나 잡히지 않는 광휘. 그래, 그런 것인지도.


“근데 송라한. 날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마. 알고 보면 내가 대책 없는 로맨티시스트거든.”


살구 하나를 따서 반으로 쪼개더니 씨를 바닥에 던지고 과육을 베어 물며 은세는 어깨를 으쓱했다.


“로맨티시스트…… 세상에서 잊힌 말인 줄 알았는데. 그 말이 네 입에서 나오다니.”


은성은 믿기지 않으면서도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로맨티시스트인지는 모르겠고 네가 유머라는 걸 좀 아는 사람이 된 것 같긴 하다.”


라한의 말에 쿡 웃는 은성을 보며 은세도 웃었다. 새큼하고 들큼한 살구의 속살을 꾹꾹 씹으면서 건조하고 씁쓸하게.


“실은 여행 떠나는 길에 얼굴 보고 가려고 들렀어. 우선은 크로아티아로 갈 거고,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다 올 거야.”


라한과 은성이 함께 만든 샌드위치에 은세가 가져온 샤우르스 치즈와 2004년 빈티지 샴페인을 곁들여 점심을 먹다가 은세가 실토했다.


“할머니가 허락하셨어? 너 후반기 투어 복귀 안 하면 상금 순위 밀려서 내년도 풀시드 확보 못할 텐데?”


은성이 펄쩍 뛰게 놀랐다. 은세는 프로 골퍼였다. 지난 봄 발목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투어 대회 출전을 쉬고 있었다. 그리 심각한 부상은 아니어서 치료는 진즉에 끝났고 재활 또한 순조로웠지만 은세는 이 핑계 저 핑계로 투어 복귀를 미뤄 왔던 것이다.


“말도 마. 할머니랑 할머니 친구분들 수발 라운딩 몇 번이나 나가고 겨우 허락 받았어. 올 시즌 이대로 오프하는 대신 여행 다녀와서부터는 죽어라 훈련하겠다, 내년 시드는 시드전 나가서 기필코 따내겠다, 내년에는 꼭 우승컵 하나 안겨 드리겠다, 기타등등 얼마나 비굴하게 졸랐다고.”


소혜 여사는 친구들과 함께 나가는 라운딩에 간혹 한 번씩 은세를 일일 코치로 대동했다. 그걸 은세는 뒤에서 수발 라운딩이라고 불렀다. 말이 좋아 일일 코치지 실상은 우아하신 마나님들 시중드는 하녀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우승컵? 거 참, 여행이 그렇게 가고 싶었냐?”


너답지 않다고 라한의 표정에 씌어 있었다.


은세는 골프를 즐기는 편이었지만 우승이나 상금에 연연하지 않았다. 정규 투어에 입문한 이래 단 한 번도 풀시드를 잃지 않았으면서도 우승 또한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서은세 프로가 우승을 못 하는 건 절박함이 없어서라는 설이 업계에서도 공공연하게 떠돌 정도였다. 그게 부유한 배경 때문이라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식으로 할 값이면 귀한 정규 투어 시드 차지하고 있지 말고 골프 접으라고 은근히 비난하는 무리도 없지 않았다. 은세는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래. 어쨌거나 나는 어디로든 떠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무슨 소리야?”


은성이 물었지만 은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샴페인 잔을 들어 스스로에게 건배하더니 입도 떼지 않고 마셔 버리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샌드위치를 먹었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세 사람은 흩어졌다. 은성은 은세에게 맛있는 저녁을 먹이겠다고 읍내로 장을 보러 나가고, 은세는 샤워하고 낮잠이나 한숨 자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라한은 작업실로 건너갔다.


몰드에서 분리해낸 옆판을 재차 세심하게 다듬고 나면 뒷판과 옆판을 접착하는 작업이 기다린다. 아교와 클램프를 사용하여 뒷판과 옆판을 접합하면 그 다음 과정은 제작가의 서명을 남기는 것이다. 라한은 라벨과 낙인을 꺼냈다.


라한은 자신만의 고유한 마크가 새겨진 낙인을 앞판과 뒤판 옆판의 안쪽에 차례로 찍었다. 약간의 연기를 내면서 마크는 나무에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손으로 서명한 라벨은 뒤판 안쪽에 붙였다. 앞판 안쪽에는 제작 시기와 서명을 손으로 남기고 그 아래에 다시 이름을 낙인으로 찍었다.


이제 앞판을 닫을 차례였다. 그 전에 한 번 더 꼼꼼히 지금까지의 작업을 살피고 점검하는데 안채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라한은 작업대에서 일어나 안채와 마당이 보이는 창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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