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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Apr 05. 2024

난생처음으로 아버지를


 뽀얀 모래언덕과 검푸르게 빛나는 해석, 아콰마린의 바다가 길게 펼쳐졌다. 


 순간 문비는 자신이 남쪽 끝의 섬에 와 있음을 실감했고, 그와 동시에 바다 건너의 사람들과 현실이 아득해졌다. 노르웨이의 프레스트반네트 호수에서조차 들지 않았던 고립감이 아득함의 정체였다. 혈육을, 생의 시작점을 찾고자 온 길인데 어째서 이런 기분인지, 당황스럽다.


 “심각할 거 없어. 편하게 생각해.”


 신호 대기 중에 영채가 손등으로 문비의 뺨을 가볍게 몇 번 쓸었다. 


 포근하고 친근한 손길. 문비는 엄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도 종종 하던 동작이었다. 긴장을 눅여 줄 때, 짜증을 달래 줄 때, 기운을 북돋워 줄 때……. 비록 고모의 손길은 조심과 절제를 지키느라 닿는 듯 마는 듯이었지만. 


 “다 왔다. 저기야.”


 바다를 마주한 야트막한 언덕 위에 외따로 위치한 집을 영채가 가리켰다. 


 방풍림으로 심어 놓은 동백나무 무리 사이를 지나온 바닷바람이 가장 먼저 문비를 맞이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버릇처럼 손가락빗으로 빗으며 문비는 고모를 따라 현관으로 향했다. 두 겹의 문이 모두 활짝 열린 채로 고정돼 있었다. 


 “오빠, 오빠.”


 영채가 불렀으나 잠잠했다. 거실에도, 거실에서 보이는 주방에도 사람이 없었다. 


 “서재에 있나? 같이 올라가 볼래?”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는 영채를 문비가 말없이 따랐다. 이층 공간으로 막 올라서는데 맞은편 테라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차에서 내릴 때 보니까 이층 테라스에 안 보이던데?”


 “옥상에…….”


 “애 오는 거, 애 타고 있는 차 들어오는 거,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그러셨구만?”


 문비는 영채 뒤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그런가? 정말로 그런 기다림과 조바심으로 옥상에 올라가 계셨던 건가? 


 “애 이리로 들여보내고 넌 좀 내려가 있어라.”


 작은 소리로 이르고 영후는 곧장 서재로 들어갔다. 단정히 빗은 반백의 머리에 마른 체구, 왠지 모르게 지쳐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우.”


 고모에게 등을 살짝 떠밀린 문비는 아버지가 들어간 문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재는 널찍하고 창문이 많아 채광과 통풍이 좋았다. 열린 창으로 파도와 바람의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입구 가까이에 길쭉한 원목 좌식 다탁과 방석이 구비돼 있었지만 아버지는 피아노 근처의 응접탁자에 앉아 있었다. 실은 문비도 그쪽이 편했다. 


 난생처음으로 아버지를 대하고 있는데 너무 무덤덤해서 문비는 스스로의 상태가 정상인지 의심스러웠다. 거짓말처럼 아무런 기분도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애틋이 건너다보는 아버지를 문비는 무심히 마주봤다. 


 “너…… 너…….”


 영후의 눈에 경악의 빛이 들어차더니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앉은 채로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이제야 영후는 알게 된 것이었다. 저 아이를 낳은 사람이 정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괜찮으세요?”


 반사적으로 다급하게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문비가 물었다. 


 “앉아라. 괜찮다.”


 시선을 피한 채 영후가 손을 내저었다. 그가 낮고 여린 혼잣말로 탄식했다. 


 “정인아, 당신……. 그래서,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문비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아버지에게서 엄마 이름이 나오고, 그러면서 그의 눈에 물기가 어리는 순간, 이상하게도 화가 치밀었다. 유례없는 뜨거운 화가 가슴에서 활활 타올랐다. 낯설고 싫은 감정이다.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영후는 정인과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그날 정인은 영후가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했었다. 


 ‘만약 추후에 누군가가 당신한테 묻거든 그날 일이 실수였다고 말하지 마. 사랑해서,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말해.’


 아니라고, 맹세코 과실이었다고 강력히 항변하는 영후에게 정인은 한 번 더 당부했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내 마지막 부탁이야. 꼭, 꼭 사랑이었다고 말해야 해. 그래야만 해. 약속해 줘.’


 정인이 왜 그렇게 절박하면서도 엄정하게 다짐을 받으려 했는지, 정인이 말한 누군가가 누구인지 영후는 깨달았다. 이십칠 년 만에 만난 딸아이의 두 눈을 보고서야. 또한 정인이 왜 문비가 초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사진마저 보내 주지 않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저는 어떻게 태어난 거죠? 제 생모는 누구죠?”


 “믿을지 모르겠다만 나는 널 정인이가 낳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도 말이다.”


 “누구냐고요, 제 생모가.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의도치 않았는데 추궁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네 엄마를 사랑했다.”


 “사랑이요? 어떤 엄마를요? 절 낳은 엄마를요? 절 기른 엄마를요? 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요! 왜, 왜 제가…….”


 다그치던 문비가 제풀에 진저리쳤다. 이토록 비정한 말이, 차갑고 날카로운 말투가 자신의 속에서 나왔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가까스로 욱여 삼킨 뒷말. 왜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실명의 예고를 받아야 하는 운명으로 태어나야 했냐고요. 왜. 왜 난 이정인 엄마의 친딸이 아닌 거죠? 이런 말들이 문비 안에서 사금파리로 조각나 흩어진다. 


 비통에 잠긴 영후의 귓가에 정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애가 다 크도록 당신한테 안 보여준 거, 내가 당신을 미워해서 그런 것 같아? 아니야. 그거 아니야. 내가 왜 그랬는지 당신도 알게 될 거야.’


 정인아, 당신……? 죽은 정인에게 영후가 마음속으로 묻는다. 


 저 아이, 자라면서 차츰 제 생모를 닮아가고, 그 모습을 내가 본다면 저 아이를 설이가 낳았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차릴 테고. 그럼 저 아이가 유전적으로 실명하게 되리라는 사실 때문에 나는 끔찍한 고통에 빠졌겠지. 그게 저 아이를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이유였니?


 무섭도록 예리한 진실이 영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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