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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Apr 08. 2024

슬픈 이름

 

 문비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초록 가죽 장정의 노트. 


 굳이 들춰볼 것도 없이 영후는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점자 악보. 가장자리가 겹쳐진 두 개의 눈 결정 음각 문양에 그의 시선이 고정됐다. 기억 저편에서 아픈 이름 하나가 물비늘처럼 일렁거린다. 


 ‘안녕하세요. 저는 설, 이설입니다.’


 맑은 소프라노의 목청이었다. 반듯한 자세와 매초롬한 용모에 한 손에는 시각장애인의 상징인 흰 지팡이를 접어 든, 스물한 살의 그녀는 정인이 데려온 손님이었다. 정인이 봉사활동을 하러다니는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만나 각별한 정을 나누게 됐다던가. 


 노래하기에 좋은 성대를 지녔다는 생각을 하는 차에 정인이 요청했다. 설이한테 노래 레슨을 해줬으면 해. 성악과에 가고 싶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해도 노력해 보고 싶대. 더 늦기 전에 도전해 보고 싶대. 의지가 굳은 친구야.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건 돕자고. 


 당신 잊었어? 난 작곡을 가르치는 사람이잖아, 성악이 아니라. 영후는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표했지만 정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학부 전공은 성악이었잖아. 설이가 가진 재능이랑 잠재력이 워낙 좋아서 당신이 기본만 잘 잡아주면 빠르게 발전할 걸. 당신도 보람 있을 거야. 


 설득하면서 정인이 영후의 손을 잡고 그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미소 지었다. 얼마 만이었던가, 정인의 꾸밈없는 웃음. 차츰 웃음을 잃어가던 아내를 웃게 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후로서는. 


 정인은 난임이었다.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시모의 성화, 하루 빨리 손자를 안겨 달라는 성화가 정인을 꼬챙이처럼 말라가게 만들던 즈음이었다. 그 시절의 정인을 숨 쉬게 하는 건 봉사활동 그리고 복지관에서 만난 설이라는 순연한 젊음이 내뿜는 생기발랄한 빛이었다. 


 “너한테 한 가지 묻자꾸나.”


 문비는 미동도 없이 묵묵했다. 


 “어떻게 알았니? 정인이가 나한테 숨겼듯이 너한테도 아무 말 않고 떠난 것 같은데.”


 영후의 가슴이 저미는 듯 옥죄어 왔다. 그가 짐작하는 것처럼 문비가 이미 자신의 유전 질환을 확인한 상태라면 너무도 잔인하게 받아들여질 질문. 그래도 확인해야만 했다. 만에 하나 문비가 아직 레버씨 시신경 위축증에 대해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알았냐고요? 어떻게 알았을까요, 제가? 엄마가 그토록 꽁꽁 숨긴 걸 제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절규에 가까운 냉소적인 반응이 충분한 답이었다. 


 딸을 계속 바라보고 있을 수 없어 영후는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각막의 문제였다면 당장에라도 자신의 것을 줄 수 있다. 먼 옛날의 전설처럼 소신공양으로 되는 일이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어줄 수 있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에선 다 소용없고 부질없으니 영후는 참담하다. 


 문비는 점자 악보 표지에 새겨진 무늬만을, 영후는 먼 바다만을 하염없이 건너다봤다. 


 비록 가슴 아픈 해후가 되고 말았지만 아이가 저렇듯 잘 자랐다는 사실만큼은 영후에게 감사고 다행했다. 죽은 정인에게 고마웠고, 그녀가 홀로 문비를 기르면서 감내해야 했을 아픔이 미안하고 애틋했다. 


 정인아, 당신. 저 아이의 눈을 볼 때마다 그 안에 숨은 유전인자가 떠올랐을 텐데. 언제 발병할지 모르고, 일단 발병하면 생모가 따로 있음을 더는 숨길 수 없고, 결국에는 실명이라는 가혹한 나락으로 아이를 빠트릴 그것이 떠올랐을 텐데.


 없애 줄 수도, 대신해 줄 수도 없는 유전 질환을 떠올릴 때마다 당신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고통스러웠을까. 슬펐을까. 나는 바란다. 차라리 당신이 그 세월 동안 나를 한껏 원망하고 미워했기를. 그 오기가 당신을 지탱하는데 한 톨의 도움이라도 되었기를. 


 타르처럼 검고 무거운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경직된 공기를 흔드는 규칙적인 파도 소리가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설, 이설. 성은 보육원 원장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안다. 첫 돌이 채 되기도 전에 보육원 앞에 버려졌고, 그날이 종일 눈이 내리던 날이라서 이름자로 눈 설雪을 얻었다더구나.”


 설雪. 예쁜 이름. 유래를 알고 나니 참 슬픈 이름. 


 눈 내리는 날 버려진 사람이 눈 내리는 날 낳은 아이가 나구나. 문비는 자기 이름의 기원이 생모에게 이어져 있음을 알았다. 무늬 문紋, 눈 펄펄 내릴 비霏. 펄펄 내리는 눈이 이 세상에 찍어 놓은 무늬, 문비. 


 언젠가 문비가 엄마에게 자신의 이름을 누가 지어 줬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엄마는 대답했다. 당연히 엄마가 지었지. 


 네가 태어나던 날 그해 첫눈이 내렸거든. 눈이라고 다 같은 눈이 아닌 거 너도 알지? 네가 오던 날의 눈은 정말이지 꽃보라처럼 꽃눈개비처럼 곱디고운 눈이었어. 축복처럼 쏟아지던 그날의 설경이 아직도 엄마 눈엔 방금 본 듯 선하단다. 


 문비는 자신이 태어나던 순간에 엄마가 곁에 있었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문비라는 이름을 지을 때 엄마가 의도적으로 생모의 흔적을 넣은 것이라고. 자신의 생모와 엄마 사이에는 둘만의 복잡한 곡절과 유대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절 낳았다는 그분…… 소재를 알고 계시면 알려 주세요.”


 문득 떠오른 말이 앞뒤 없이 그대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평소 충동적인 성향이 아니었던 문비는 이런 스스로가 서먹하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지 오래라고 들었다.”


 허탈감과 더불어 뭐라 규정할 수 없이 복잡한 기분이 문비를 엄습했다. 무슨 기대 같은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눈은…… 시력은 언제부터…….”


 그저 궁금했다. 문비는 아직 자신의 내면에 생모에 대한 어떠한 감정이나 판단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움조차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일찍부터 발병하는 건 드문 케이스라고…… 하더구나.”


 레버씨 시신경 위축증, 이 병명을 두 사람 다 입에 올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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