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진 Apr 10. 2024

인연의 굴레


 “설이는 밝고 쾌활했다. 낙천적이었고. 그 나이 때 정인이가 그랬듯이.”


 영후는 설을 사랑했지만 그에게 설은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설을 조카처럼 막냇누이처럼 어린 처제처럼 사랑했다. 그러니까 가족처럼. 


 설과 함께일 때면 정인은 예전의 정인으로 돌아가 웃고 농담하고 시름을 잊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영후는 가슴 속에서 점차 희박해져 가던 안온한 평화가 다시금 농밀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설은 편견을 깨는 존재였다. 보육원에서 자란 사람에 대한 편견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보육원 시절을 설은 긍정적으로 기억했다. 부모를 모르고 살아가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마음의 빈자리를 부정할 순 없지만 그 빈자리가 마음 자체를 춥게 하지는 못했다고.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도 가족애와 웃음이 있었다고. 


 실제로 설은 종종 입양이 결정돼 떠나는 원생들을 보며 기도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절대로 입양 같은 건 되지 않게 해달라는, 보육원에서 계속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앞을 못 보는 건 불편한 일이지만 자신은 그 불편에 얽매여 불행한 삶으로까지 끌려가진 않을 거라고 설은 말했다. 설은 자립심이 강하고 매사 능동적이었다. 장애인은 불행하고 의지가 약할 거라는 편견을 설은 쾌활한 심성과 굳은 실천력으로 깨부수어 보였다. 


 “설이가 오는 날이면 정인이도 우리 집에도 모처럼 활기가 돌아왔지.”


 여느 화목한 가정과 같이. 안락하고 미더운. 


 “제가 듣고 싶은 건 진실이에요. 한 점의 포장이나 왜곡도 없는 진실. 설령 그것이 제게 불편하거나 상처가 된다고 해도요. 저한테는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인의 간곡한 부탁과 문비의 단호한 요구 사이에서 영후는 고뇌했다. 망설이던 끝에 마침내 마음을 정한 영후는 가라앉은 어조로 천천히 서두를 열었다. 


 “그날 어머니는 정인이와 헤어질 것을 종용하셨다. 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언성을 높이며 어머니와 맞서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있겠다던 정인이는 메시지도 없이 어디론가 나가고 없었고, 나는 수면보조제를 먹고 잠이 들었지.”


 다사한 볕과 새치름한 살바람이 공존하는 계절. 목련의 꽃눈이 나날이 포동포동 부풀어가고 정원 풍경에 희미하게 연둣빛이 오르는 초봄이었다. 


 본가에서 자고 올 예정이었던 영후가 어머니와 다투고 뜻하지 않게 집으로 돌아와 버리지 않았더라면. 정인이 평소 드나들며 돌보던 이웃 독거노파의 다급한 연락, 부엌에서 넘어졌는데 일어나지를 못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집을 비우지 않았더라면. 


 가문비라는 한 생명은 지구별로 초대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아니 초대받지 못했을 것이 확실하다. 


 놀러 오기로 약속돼 있던 설에게 정인이 전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꼬리뼈가 골절된 이웃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 가야 하니 먼저 집에 가 있으라는 전화를 설이 받지 못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열린 침실 문 안쪽에서 누군가 자고 있다는 기척을 설이 느끼는 일도. 침대에 누운 이의 얼굴을 그녀가 더듬는 일도. 수면보조제에 취한 영후가 설의 손길을 정인의 손길로 착각하는 일도. 정인을 부르는 그의 섬어를 들었으면서도 설이 그를 향해 떨리는 입술을 내리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훗날 가문비라는 이름으로 불릴 한 생명을 불러오는 일이. 

 우연의 중첩과 착각과 외사랑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시점에서.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영후는 설을 알아보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기혐오와 자책에 빠진 그에게 설은 슬프게 말했다. 


 교수님 잘못 아니에요. 제가 선택한 거예요. 나쁜 건 저예요. 정인 선생님 몰래 교수님을 사랑해서. 교수님도 모르게 교수님을 사랑해서. 하지만 후회하진 않아요. 정인 선생님께는 너무 크고 무서운 죄를 지어 버렸지만…….


 “그 마음을, 정인이도 나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만났을 때 정인이가 그러더구나. 우리가 설이의 마음을 까맣게 몰랐던 건, 설이가 철저히 조심하고 숨긴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편견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장애를 가진 설이가, 우리를 은인처럼 여기는 설이가 그런 마음을 품을 리 없다는, 어찌 보면 오만한 편견.”


 여전히 바다에 머물러 있는 영후의 눈에 회한과 괴로움과 물기가 붉게 차올랐다. 


 문비가 아버지를 바라봤다. 지친 기색의 수척한 얼굴, 그 윤곽과 굴곡이 거울 속에서 본 자신의 그것과 흡사한 데가 있었다. 문비는 흠칫 시선을 돌렸다. 


 착오 혹은 과실과 용납될 수 없는 사랑의 짧은 스침. 문비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생명이 싹튼 지점은 그렇게 정의됐다. 당혹스럽고 스산한 진실.


 “카세트테이프가 있었어요. 인어공주 동화가 녹음된. 그거 혹시……?”


 “그래, 설이 목소리가 맞다. 샘플용으로 녹음한 거였지. 소리도서 제작을 위한 샘플. 정인이가 제안했다. 설이가 좋은 목소리를 가졌으니 소리도서 만드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설이도 기뻐했고.”


 앞을 못 보는 설은 책을 보면서 낭독할 수 없으니 미리 외워서 녹음해야 했다. 그러나 설은 기대 이상으로 잘 해냈다. 


 “기억력이 아주 뛰어났다. 정인이가 읽어 주면 책 한 페이지 분량쯤은 몇 번만 들어도 그대로 외울 정도로.”


 영후가 딸을 돌아봤다. 비스듬히 내려뜬 문비의 눈은 종잡을 수 없이 멍한 빛이었다. 


 “악보 노트를 만들 때 이름을 대신해서 그런 문양을 새겨 달라고 설이가 요청하자 정인이는 마침 자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즐겁게 웃었지.”


 천천히 문비가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묻고 있다. 


 엄마는 어떻게 해서 나를 자신이 낳은 것처럼 감쪽같이 꾸밀 수 있었던 건가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전 04화 슬픈 이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