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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Apr 15. 2024

끝내 말이 되지 못한 진심


 막상 마음을 정하고, 내려놓을 거 내려놓으니까 편해지더라.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어. 당분간 힘들겠지만 차곡차곡 시간이 쌓여 가면 그 시간이 붕대처럼 상처를 덮어 주겠지. 그럼 새 삶을 꾸릴 수도 있을 거야. 


 영후가 함께 견디고 함께 시간을 쌓는 건 왜 안 된다는 거냐고 되받아 묻기도 전에 정인은 덧붙였다. 


 충분할 만큼의 시간이 쌓일 때까지 내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당신을 보면서는. 


 정인은 곤혹스럽고 슬픈 얼굴이었다. 영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아기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 댄 채 창문을 향해 돌아섰다. 갓난 생명에게서 싱그럽게 비린 따스함이 끼쳐 왔고, 영후의 눈에서 뜨겁고 쓰라린 눈물이 솟았다. 


 결혼 생활의 마침점인 동시에 긴 생이별의 시작점이 아물지 못하는 멍울로 심장에 꾹 찍히던 날이었다. 


 “그분…… 그러니까 제 생모는요? 다시 만나지 못하셨나요?”


 영후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 초봄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치 세상에서 증발하기라도 한 듯이.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었기라도 한 듯이.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 아니지, 정인이가 널 데려왔으니 정인이와는 왕래가 있었겠지.”


 “그분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혹시 엄마가 말씀하셨나요?”


 “듣지 못했다. 가여운 젊은 넋이 어디에서 쉬고 있는지도, 내가 묻기는 물었으나 아는 듯도 하고 모르는 듯도 한 낯빛을 하고는 아무 말 않더구나.”


 다시 침묵이 흘렀다. 


 문비는 아버지에게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다 들었음을 알았다. 마음이 텅 빈 항아리 같았다. 쓸쓸한 바람만이 드나드는, 금 간 항아리. 


 정작 하고 싶은 말들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영후의 마음인들 온전할 리 없었다. 그의 마음은 화롯불에 들끓는 약탕기 같았다. 돌보는 이 없이 혼자서 어둡게 더 어둡게 그리고 쓰디쓰게 졸아들어만 가는. 


 미안하다는 말, 외려 상처가 되면 어쩌나 저어돼서. 


 사랑한다는 말, 면목 없고 무렴해서. 


 늘 너를 그리워했다는 말, 네 행복을 바랐다는 말…… 감히 자격이 없는 듯해서. 


 끝내 말이 되지 못한 진심. 


 “이만…… 가 봐야겠어요.”


 문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영후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일어났다. 


 “제가 바쁜 일들이 있어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미리 끊어서 왔어요. 그래서 시간이…….”


 현관에서 신을 신다 말고 문비가 말했다. 비행기 표를 예매해 둔 것은 사실, 바쁜 일이 있다는 것은 거짓, 결국은 변명. 그러나 하지 않는 편보다 하는 편이 훨씬 나은 변명이었다. 문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듣는 쪽을 위한. 


 “그래, 그랬구나.”


 얼굴 근육이 얼마간 부드럽게 풀어지면서 영후가 한 번 더 끄덕였다. 문비는 가볍게 묵례하고 차에 탔다. 


 영채는 조용히 운전만 했다. 부녀가 마주앉아 있는 동안 영채는 집 안팎을 드나들며 집안일이며 텃밭 관리며 나름대로 바빴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에게도 딸에게도 어려운 자리였을 거라는 가늠은 갔다. 


 크게 휘어지는 모롱이 길로 차가 접어들면서 문비의 오른쪽 열린 차창 멀리로 방금 나온 그 집이 나타났다. 무심코 창밖을 보고 있던 문비는 옥상 난간에 두 팔을 걸친 채 이쪽을 바라기하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멀고 조그맣고 구부정하게 보이던 아버지의 모습은 빠르게 지나쳐 사라지고 해안 풍경이 시야를 채웠다. 저도 모르게 내뱉은 한숨을 해풍이 쓸어 갔다. 


 문비는 문득 극심한 피로감에 휩싸였다. 어떤 세월의 피로 같은 것. 몇십 년 세월을 순식간에 살아 버린 사람이나 느낄 것 같은 피로감이었다. 


 “쉽지 않지? 왜 안 그렇겠어.”


 내내 묵묵하던 영채가 마침내 말부리를 헐었다. 


 “부담 갖지 말고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고 살아. 이제 와서 혈연이라는 끈에 억지로 얽매일 필요 없어. 묻어 두고 싶으면 묻어 버리고 살던 대로 살아. 봐야겠다 싶으면 언제라도 찾아오고. 그러면 되는 거야.”


 문비가 고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진지하면서도 산뜻한, 말의 요지와 일치하는 낯빛. 운전대를 조작하는 느긋하고 침착한 동작. 거기에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유유함이 있었다. 파도나 뭉게구름 같은 것들이 흐르는 풍경처럼. 


 “네. 그럴 참이었어요.”


 솔직한 대답을 하는 문비를 흘깃 돌아보고 다시 전방을 주시하면서 영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풋 웃었다. 


 “누가 이정인 딸 아니랄까봐. 정인 언니도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가 분명해서 하여간 빈말이라는 건 할 줄을 몰랐거든.”


 그리움이 묻어나는 어투였다. 


 문비는 ‘이정인 딸’이라는 말이 서글펐다. 엄마의 선택과 결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레버씨 시신경 증후군 때문에 끝까지 숨길 수 없음을 잘 알았을 테데. 도대체 왜……. 이해할 수 없는 엄마지만 또 견딜 수 없이 그립다. 아직도 문비에게 엄마는 이정인 한 사람이었다. 


 “서운하지 않으셨어요, 엄마한테?”


 정인이 영후와 이혼하면서 그의 동생이자 자신의 절친한 후배인 영채와의 연까지 끊어 버렸던 일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바다 좀 보렴.”


 “네?”


 질문과는 무관한 엉뚱한 말을 들은 문비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두 눈이 동그래졌지만 고모의 표정과 어조는 변함없이 온화하고 다정했다. 


 “햇빛이 비쳐서 물결이 반짝반짝하잖아.”


 “아름다워요. 맑고, 빛나고.”


 “정인 언니와 난 그런 시절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했지. 더없이 푸르고 찬란한 시절. 나는, 서운하지 않았어. 정인 언니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견디고 살려면, 잊고 살려면. 내가 그 입장이었어도 그랬겠다 싶고.”


 “더없이 푸르고 찬란한 시절. 엄마도 그렇게 표현했던 적이 있었어요.”


 “우리가 좀 그랬어. 서로 짠 것도 아닌데 똑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달까.”


 영채의 표정이 회상에 젖어 아련해졌다. 


 “서운하진 않았지만 아쉽긴 했단다. 이런 건 정인 언니 보여주면 좋아할 텐데, 이 얘기는 정인 언니 들려주면 웃겨 죽을 텐데, 그런 것들이 있거든. 둘만의 세계에서만 의미 있는, 재미있는, 그런 것들이.”


 문비는 고모의 옆얼굴을 가만히 건너다봤다. 그 눈에 웃음기와 물기가 동시에 맺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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