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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Apr 12. 2024

어린 생명은 무고하니까


 “사람이 그렇게 냉연하게 화를 낼 수도 있다는 걸, 불같은 화보다 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얼음장 같은 화라는 걸, 그때 정인이를 보면서 알았다.”


 집에 돌아온 정인은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서 술을 마시던 영후를 발견했다. 불을 켜려던 정인을 만류한 영후는 자신이 저지르고 만 과오를 어둠과 취기에 기대어 고백했다. 이후에 일어날 사태는 불 보듯 뻔했지만 애초에 정인을 속일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인은 조용해서 더 위태롭고 압도적이었다. 그녀는 언성 높여 탓하지도 물건을 집어던지지도 않았다. 울지조차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 무너져 석상처럼 검게 주저앉아 있었다. 무서운 고요가 오래 지속됐다. 이윽고 정인의 나직한 말소리가 고요를 깼다. 


 나가. 


 정인아…….


 이 집에서 나가 줘. 


 정인아, 정인아…….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 볼 수가 없어. 


 차분하고 명료한 말들. 단절,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을 예감케 하는. 절망을 주는. 그러나 거스를 수 없는. 뼈아픈 말들. 


 영후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허청거리며 집을 나섰다. 본가로 거처를 옮긴 영후는 정인에게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고 만나서 대화하기를 원했지만 정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시간이 더 필요해. 간결하고 단호한 대답. 


 대답이 쌓이는 만큼 정인이 멀어져 가는 걸 영후는 느꼈고 번번이 내상을 입었다. 정인이 외면하고 있는 이상 어디에도 내보여서는 안 될 상처. 그것을 자신에게 내려진 벌이라고 여기는 것만이 영후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하고도 고통스러운 위안이었다. 


 삼 개월쯤이 지나가고 정인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영후는 정인의 감정이 다소나마 누그러졌기를 기대하면서 일단 만나자고, 만나서 얘기하자고 애원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 정인이 보고 싶었다. 


 정인은 수화기 너머에서 자신의 말만 했다. 


 지금처럼 별거 상태로 일 년, 나한테 일 년만 더 줘. 그 정도면 결론이 나올 것 같아. 이 갈림길에서 내가 원하는 길이 어느 쪽인지. 우리 둘 모두에게 보다 바람직한 방향이 어떤 건지. 고민해 보려고. 치열하게 맹렬하게. 


 “정인이가 그렇게 나오는데 내가 뭘 어쩔 수 있었겠니.”


 의도치는 않았다 해도 실책은 영후에게 귀속돼 있었고 이미 일어난 일은 무로 되돌릴 수 없다. 영후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정인에게서 배어나는 가장 큰 감정의 파장은 실망이었고, 그건 곧 영후의 절망이었다. 정인이 분노하고 탓하고 몰아세웠더라면 영후는 오히려 거기에서 일말의 여지를 보았을 터였다. 그러나 정인이 내내 냉정했으므로 영후는 속절없이 무력했다. 


 “이듬해 초에 마침내 정인이가 찾아왔더구나. 널 안고서. 갓난아기인 널. 조막만 한 얼굴이 아직도 발갛던 널. 내가 본 가장 예쁜 아기인 널.”


 어딘지 모르게 그러나 분명히 날 닮은 널. 


 가급적이면 감상적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던 영후의 경계가 잠시 흔들린다. 그 아기가 아름다운 젊은이로 어엿하게 자라 줬다는 것이 새삼 감격스럽다. 


 그날 자신의 품에 안겨 고물거리는 천사 같은 피붙이를 보면서 영후는 한 가닥 희망의 실마리를 붙잡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혼해, 우리. 


 담담한 목소리로 정인이 요구했다. 정인은 한 달 가량 된 해산어미 치고는 건강해 보였으며 체형도 이전 그대로였다. 


 영후는 회복이 빨랐나 보다, 다행이다, 그렇게만 생각했지 다른 의문이나 의심 같은 건 털끝만큼도 떠올리지 못했다.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정인의 말에 영후는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아기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애 출생 신고부터 하고, 이혼해. 그렇게 해줘. 그게 내 결론이야. 쉽게 내린 결정 아냐. 고민하지 않고 편하게 흘려보낸 시간은 단 일 초도 없었던 듯 느껴질 만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야. 애를 내가 맡는 거. 다른 건 다 당신 좋을 대로 해. 


 영후가 원하는 것도 단 하나뿐. 그러니까 세 식구가 헤어지지 않는 것, 가정을 지켜나가는 것. 불행히도 정인의 요구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이, 이젠 아이가 있잖아. 아이…….


 필사적으로 했던 말이 고작 이런 것이었던 기억이 영후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이 마음을 가지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런 어리석은 소리만 되뇌다 끝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파경은 면치 못했겠지만 그 과정은 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의 시간들 또한. 


 “그때의 나는 너무 경황이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별거를 하면서부터는 얼이 빠져 있었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정인이를 설득할 여력도 정신도 없었다. 정인이는…… 정인이 표정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별무소용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아기를 안고 온 정인의 눈빛은 확연히 정돈돼 있었고 단단했다. 그 눈빛에서 영후는 볼 수 있었다.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실망감의 음영을. 


 정인은 부러질망정 휘어져 본 적 없는 사람이었고 영후는 누구보다 그녀의 그런 성정을 잘 알았다. 돌이키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런 정인이 아이에게만은 대책 없이 휘어지고 휘둘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명백했다. 


 아이를 향한 그녀의 시선에서, 손길에서. 아이를 안고 있거나 보고 있지 않은 모든 찰나에도 온몸에서. 고스란히 얼비쳐 나왔다. 모성애가, 불가사의하리만치 강렬한 모성애가. 


 다행이다, 감사하다, 어린 생명은 무고하니까. 아이에게 얽힌 비밀을 모르는 채로 영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정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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