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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Apr 03. 2024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밖으로 나오니 여명에 젖은 구월 공기가 제법 선득하다. 


 이곳에서는 봄여름은 더디고도 짧고 가을겨울은 성급하면서 선명하고 길다던 문비의 말이 떠오르고 라한의 눈길은 자연스레 건너편에 가 닿았다. 이쪽에서 보이는 모든 창이 불빛을 머금고 있다. 그 환함에 미소가 지어진다. 


 미소는 한길로 이어진 돌계단의 끝에서 놀란 빛으로 바뀌었다. 다리목에서 문비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러닝화를 신고. 


 “웬일이에요?”


 “웬일은요. 같이 뛰려고요.”


 말을 마치자마자 문비가 앞장서 달려 나갔다. 꽤나 빠르게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라한도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력질주하면 얼마 못 달리고 지쳐 버릴 걸요.”


 성큼성큼 거리를 좁히며 라한이 소리쳤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 거,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뭔가, 자유롭고, 통쾌한 느낌이에요.”


 숨이 찬 문비가 말을 뚝뚝 끊어서 그러나 힘차게 대꾸했다. 조금씩 속력이 줄어드는 데도 멈출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라한은 문비를 추월하지 않고 이 미터 가량의 간격을 유지했다. 얼마간 더 달리던 문비가 이윽고 멈춰 섰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인 문비의 목에서 쇠 냄새와 함께 잔기침이 올라왔다. 라한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몸을 펴고 길게 심호흡을 해요. 물부터 마시고.”


 손에 들고 있던 아령 모양 물병을 열어 문비에게 건네며 라한이 조언했다. 문비는 그가 시키는 대로 물을 마시고 긴 심호흡을 시도했다. 


 “좀 나아져요?”


 “네. 조금요. 그리고 좀 덜 두려워졌어요. 나를 낳은 생모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 일이.”


 문비는 오늘 제주도에 갈 예정이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자신의 출생을 둘러싼 의문을 풀겠다는 결심으로. 

 라한이 문비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아무것도 미리 예상해 놓지 말아요. 어떤 예상도 진실과는 거리가 있을 테니까.”


 진실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테다. 문비의 출생과 성장에 관여한 세 사람을 둘러싸고 공유된 진실, 세 사람 각각이 품은 진실. 라한은 문비가 자신의 말을 이해할 것을 믿었다. 


 “그래 볼게요. 아무런 상상도, 선입견도 안 가지도록 노력해 볼게요. 어떤 사실에 부닥치더라도 사실에만 매여 진실을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은 없지만, 애써 볼게요.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문제니까. 나 자신을 위해. 그러면 되는 거죠?”


 그의 손을 문비가 더 꼭 쥐었다가 놓았다. 


 요즈음 들어 문비는 한층 살갑고 친밀하다. 관계의 속도 조절 사인과는 별개로 밀도는 오히려 높아졌다는 느낌을 라한은 받았다. 그 느낌이 맞았다. 문비는 그가 안정감 어린 애정을 받고 있다고 느끼기를 바랐으니. 눈의 유전병을 숨기고 있다는 미안함이 들 때면 더 더욱. 


 “원한다면 같이 가 줄 수 있어요.”


 문비는 씩씩한 눈웃음을 보이며 도리질했다. 


 “싫다고 할 줄은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내 마음이 그렇다는 말은 해주고 싶었고.”


 당신은 고집 센 사람이니까. 나는 그 고집마저 사랑스러우니까. 


 “말 안 해도 그 마음이 그렇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그 말을 들어서 더 좋고.”


 당신은 사려 깊은 사람이니까. 나는 당신이 사려 깊으면서도 표현에 인색하지는 않은 사람이라서 더 좋으니까. 


 “걸을까요?”


 “더 달릴 거예요.”


 물병을 든 채로 문비는 다시 전속력으로 달음박질쳤다. 


 숨이 턱에 차고 땅이 울리는 게 좋았다. 얼굴과 몸을 빠르게 스쳐가는 공기의 흐름이 좋았다. 힘껏 뜀박질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은 남았다는 게 소중했다. 실명하고 나면 이렇게 거칠 것 없는 전력질주 같은 건 불가능해질 테니까.  


 먼동이 터 오는 하늘가가 시리도록 맑다. 저기 가을이 스미어 있기 때문이다. 


 새 계절이 보내는 시각적인 신호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숨이 차다 못해 폐부가 아플 때까지 문비는 힘껏 달리고 또 달렸다. 


 * * *


 맑았던 육지와 달리 제주도는 구름에 덮여 있었고, 공항에 영채고모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저께 오빠가 전화해서 부탁하더라. 너 올 거니까 며칠 엄마랑 교대 좀 해 달라고. 솔직히 너도 네 할머니보단 내가 훨씬 대하기에 편하지?”


 능숙한 운전으로 공항을 빠져나가면서 영채가 옆자리의 문비를 힐긋 돌아봤다. 기실 그랬으므로 문비는 보일 듯 말 듯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엄마가 누구한테든 그리 편한 분은 아니시지. 근데 너 그거 아니? 네 엄마도 알고 보면 만만찮다는 거. 흉보는 거 아니니까 눈에 힘주지 말고 들어 봐.”


 고모가 연출하는 짐짓 명랑한 분위기가 문비는 싫지 않았다. 


 “문비 너, 점심때도 아니고 저녁때도 아닌 이런 어정쩡한 시간에 오겠다고 한 거, 우리랑 같이 식사하기 싫어서잖아. 틀려?”


 문비는 한 번 더 씁쓸하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네 엄마가 그런 식이었거든.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친절하지만 밥은 자기가 같이 먹고 싶은 사람 아니면 절대 같이 안 먹었어. 찬찬히 보면 너 하는 품이 꼭 이정인이야. 어련하겠어? 모녀지간인데. 참고로 고모 성격은 할머니 안 닮았다. 할아버지 닮았어. 정말이야.”


 고모는 내 생모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나 보다, 문비는 생각했다. 추측보다는 확신에 가까웠다. 


 “어디 편찮으신 데가 있는 거죠? 맞죠? 그렇지 않으면 두 분이 교대를 해 가면서까지 반드시 누가 옆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을 거잖아요.”


 아버지 소리가 안 나오니 주어를 생략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비가 고모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아직은 고모 소리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좀 편찮으시긴 한데, 별 거 아니야. 나이 들어서 아픈 데 한두 군데 없는 사람 있디?”


 비교적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문비로서는 긴가민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동안 영채도 말이 없어서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고 어느 결에 차창 밖 풍경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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