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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Apr 01. 2024

불가능한 상상


 부쩍 아깝고 소중해져 버린 시간 그리고 나날, 문비는 티거 의사의 지시를 성실히 따랐다. 그가 처방한 약과 비타민 제제들을 꼬박꼬박 복용했고 그림 작업을 하는 사이 가능한 한 눈에 자주 휴식을 주려 애썼다. 


 시신경을 유지하는 시간을 벌기 위한 안간힘이라면 안간힘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그러니까 마지막이 될 그림 작업을 잘 마무리하기 위한. 평범한 삶의 장면을 연장하기 위한. 


 식물학 그림을 그린다는 건 엄청난 세심함과 정교함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레버씨 시신경 위축증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중심 시력이 흔들리고 색의 포화도가 저하되는 현상이 시작되면 더 이상 그림 작업을 할 수 없을 거라고 티거 의사가 말한 바 있었다. 


 이어서 시야 소실, 색각 이상……. 티거 의사의 설명이 문비의 뇌리에서 줄줄이 재생됐다. 


 저도 모르게 가늘게 떨고 있던 손에서 물컵을 내려놓은 문비는 생각해 보려 애썼다. 식물학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이후의 삶을. 


 막연히 식물이 좋아 식물을 공부하는 학과에 진학했다. 전공 관련 커리큘럼 중에 식물학 그림이 포함돼 있었다. 그 수업을 듣던 어느 날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식물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문비를 직격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순간순간에는, 하루하루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와 돌이켜보니 행복하게 지나온 시절이구나 싶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해나왔으니. 


 창백하게 굳은 문비가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도저히 불가능했다. 식물학 그림이라는 부분을 깨끗이 도려낸 자신의 삶을 상상한다는 건. 


 언제 내렸는지 모를 땅거미가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문비는 소스라치면서 주방 등의 스위치를 눌렀다. 최근 문비는 어둠이 내리기 전에 미리 집 안의 조명을 밝히는 습관이 생겼다. 


 거실 등과 자신이 쓰는 침실의 등을 켜 놓고 나서 작업실로 쓰는 서재로 갔다. 방의 등 말고도 스탠드를 두 개나 더 켜고서야 문비는 책상 앞에 앉았다. 연필을 들고 아까 하다 만 곰취 꽃 스케치를 시작했다. 


 밤에는 그림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규칙이 무너지는 줄을 자각하지 못한 채. 필사적인 손놀림으로. 


 *  *  *


 “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아니면 혹시 잠을 잘 못잔 건가?”


 새벽 달리기를 나가려고 방에서 나오던 라한이 소파에 올라앉은 은성을 발견하고는 놀란 빛을 띠었다.


 “못 잔 건 아니고 눈이 일찍 떠졌어.”


 세운 무릎에 팔을 얹고 턱을 괸 은성은 동그맣고 자그맣다. 목소리가 밝아서 라한은 안심했다. 은성의 앞 탁자에는 천이 수북 쌓여 있다. 가지런히 개킨 리넨과 순면. 은성이 바지런히 삶고 손질해 놓은 희고 부드러운 원단이다. 


 “아, 오늘 처음으로 외나물 꽃으로 염색해 본다고 했었지. 그것들이야?”


 “응. 근데 아무래도 나 좀 긴장되나 봐. 이렇게 일찍 눈이 떠진 걸 보면. 그동안 주로 황토 염색만 해 와서 외나물 꽃처럼 고운 빛깔도, 식물 원료 천연염색도 처음이잖아. 공부랑 준비는 제법 열심히 했지만 실제로 잘 할 수 있을지, 또 그렇게 고운 물을 입은 이 옷감들로 무얼 만들면 좋을지.”


 떨리기도 하지만 즐거운 고민이라고 은성의 표정이 덧붙이고 있다. 


 “누난 잘 할 수 있어. 틀림없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자신해?”


 “내가 믿으니까, 누나가 잘 해낼 것을. 그리고 누난 한 번도 내 믿음을 깨트린 적이 없으니까.”


 대답이 마음에 든 은성이 방긋 웃었다. 


 “이렇게 괜찮은 널 문비씨는 왜 빨리 데려가지 않는 걸까? 아니, 우리가 문비씨를 빨리 데려와야 하는 건가?”


 라한은 딴전 부리는 얼굴로 어깨만 살짝 으쓱였다. 


 “그럴 게 아니라 너 잠깐 앉아 봐.”


 갑자기 차분해진 은성의 말을 라한은 물리치지 못했다. 순순히 은성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너희 둘, 서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도 문비씨랑 진짜 가족이 돼서 살뜰하게 챙겨주고 다정하게 돌봐주고 그러고 싶거든. 한 번씩 문비씨 혼자 있는 모습 건너다보일 때면 괜히 뭉클할 때가 많아.”


 한여름인데도 추워 보일 때가. 한없이 가냘프고 공허해 보일 때가. 무작정 뛰어가 안아 주고 싶도록. 우리가 있으니까 괜찮아, 라고 말해주고 싶도록.


 “어머니도 자꾸 물어보셔. 너 뭔가 예전과 다르다고, 아무래도 누가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드신다고.”


 “중간에서 누나가 난처하긴 하겠다.”


 라한은 잠시 숙고했다. 문비에게는 그녀 나름의 사정과 속도가 있을 터였다. 라한은 종종 문비에게서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라는 사인이 오는 듯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관계의 속도 조절 같은 것. 


 “그러니까. 얼마간 진전을 시켜보는 게 어떨까 해서. 어머니, 얼마나 좋아하실 거야? 할머니랑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실 거고.”


 은성이 조심스레 라한의 의중을 물었다. 


 “그게…… 문비씨가 어머니 잃은 지 아직 일 년도 채 안 지났고…….”


 담담하게 꺼냈던 말을 라한은 천천히 흐렸다. 은성이 사려 깊은 눈으로 조용히 응시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느긋하게 기다릴게. 나도 두 사람 믿으니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잔소리는 꼭 해야겠어.”


 “뭔데?”


 “어설프게 머뭇대다 놓쳐 버리는 일은 없기.”


 라한이 단 한 번 굳건히 끄덕였다. 그런 일은 없어,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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