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걷는 홈스쿨링
막내와 함께 센터를 다녀왔다. 아이가 수업에 들어간 시간,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내 무릎으로 콩 부딪쳐오는 것이 있다. 웬 여자아이가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오다가 의자에 앉아 있는 내 무릎과 만난 것이다. “빨리 나와!” 뒤이어 아이의 엄마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이를 채근한다. 엄마 품속에는 아이의 동생으로 보이는 아기가 아기띠에 안겨있다. 지난주에도 엄마와 실랑이를 하며 센터에서 대성통곡하던 바로 그 아이다.
딱 봐도 동생만 엄마품에 안겨 있는 게 속상한 마음이 읽힌다. 아이가 울자 엄마는 계속해서 왜 우냐고 야단이고 아이는 옥타브를 높여서 울기 시작한다. 결국 화가 잔뜩 난 엄마가 동생은 아기띠로, 첫째는 등으로 업고 나가는데 아이는 결국 다시 울음바다다.
첫째도 짠하고 무엇보다 엄마도 짠해 보여서 ‘힘드시죠?’하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울컥거린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남의 집 아이에게는 그렇게 마음이 잘 동하면서 내 아이들에게는 왜 매몰찰까 하는 생각이 든다. 떠오르는 생각을 넘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아마도 내가 힘들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는 감정을 읽어주고 위로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될 수 있지만, 내가 책임지고 힘들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은 조급해지고 해결은 빨리해야겠는데 어느 세월에 공감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빠르고 손쉽게 해결하려는 조급한 마음은 성마르게 신경질 내거나 윽박지르거나 하는 방법으로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뭐 했다고 우는데? 왜 울어! 왜 또 이래.” 아이의 엄마에게서 나온 성마른 말들은 내 입술에서도 숱하게 나온 적이 있던 말들이다. 그렇게 내뱉을 때는 얼마나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인지 나도 이미 안다. 그래서 아이의 엄마를 바라볼 때 마음이 저려온 것이다.
조급함이 문제다. 조급하지 않으면 아이의 행동이 아닌 그 이면을 볼 수 있다.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 상황을 종식시키려는 조급함이 아니라 우리 아이가 오늘은 왜 이럴까, 그저 주저앉아서, 아이와 함께 쭈그리고 앉아서, 부둥켜 앉고 마냥 시간을 보내도 괜찮다. 이해되면 이해되는대로 좋고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아도 아이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말없이 온몸으로 전할 수 있으니 좋다.
늘 서두르는 것이 탈을 일으킨다. 정말 더 늦어도 괜찮을까. 지금도 한참 걸음이 느린 것 같은데 더 늦어도 괜찮은 걸까요. 주님께 여쭤본다. 천천히 걸어가라고, 아이와 함께 보폭을 맞춰 걸으라고 내가 이 길로 부른 것 아니니, 딸아. 눈앞에 일어난 상황보다 내 마음이 늘 먼저 일했단다. 눈에 보이는 상황들은 너를 향한, 너의 아이들을 향한 내 마음이 앞서 일한 열매들이란다. 상황보다 먼저 일하기 시작한 내 마음을 읽어보렴. 늘 사랑이었다. 늘 사랑이란다. 일찍 가지 않아도 돼. 천천히, 충분히 누리며 가라고 내 마음이 너를 위해 일하고 있단다.
그 아이의 엄마는 첫째 아이를 안아줬을까. 내가 가서 아이의 엄마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이었을까. 내가 널 안아줄테니 너는 나의 아이를 안아주렴.
아버지는 이 한 번의 포옹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이 있으셔서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나보다. 천천히 가야 보인다. 아버지의 마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