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훌쩍”
토요일 오후 아이들과 함께 나가려고 씻고 나왔다. 씻으러 들어가기 전에 소파에서 울던 둘째가 계속 울고 있다. 첫째에게만 용돈을 줬다는 것이 이유였다. 친구와 분식집에 가려는데 첫째 아이 수중에 있는 돈이 너무 코딱지만 했다. 그 돈으로나마 먹을거리를 골라보겠다고 집에 놀러 온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돈 얼마를 보태준 것이다. 친구끼리 가는 생애 첫 분식집이었다. 뒤이어 들어온 둘째가 형에게만 용돈을 줬다고 난리가 났다. 같이 따라나서려는 둘째에게도 용돈을 보태줄 수 있었겠지만 며칠 전 할머니를 졸라서 용돈을 얻어낼 때 엄마와 한 약속이 있어서 쉽게 내어줄 수가 없다.
“이 용돈 잘 관리해서 써봐. 앞으로 한 달 동안 엄마가 간식을 사주거나 장난감 사주는 일은 없어.”
눈앞의 거액에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한 둘째였다. 형이 분식집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둘째 수중에 할머니가 주신 용돈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는데도 형만 용돈 줬다는 사실에 꽂혀 계속 울음바람이다.
아빠가 여차저차 달래서 둘째에게 용돈을 조금 보태줬다.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출발하는데 둘째가 삐딱선이다. 나는 심지어 초보운전인데 말이다! 운전이 신경 쓰여 화를 낼 수도 없고 반대로 운전이 신경 쓰여 계속 저렇게 놔둘 수도 없고 부글거리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교회에서 내가 맡은 방과후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수강생에는 당연히 우리 아이들도 포함이다. 거기서도 둘째의 삐딱선은 계속됐다. 해결된 거 아니었어?! 엄마한테 왜 이래! 소리 없는 분노가 가슴에서 들끓다가 수업 중 가르치는 구절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Sinful nature makes us sin." -JEBS; Who made the world? 중에서
아이들과 수없이 복습해왔던 문장이다. 내가 화를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죄라는 마음을 주신다. 그 감동으로 수업 내내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수업 중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풀리나 했더니 수업이 끝나자 둘째가 다가온다.
“엄마 용돈 조금만 더 주면 안 돼요?”
모기만한 소리로 물어본다. 수업 끝나고 분식집에 갈텐데 아무래도 아빠가 쥐여준 돈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목적이 있어도 기분이 틀어져 버리면 절대 부탁하지 않는 둘째가 모기만한 소리로라도 부탁해오는 것은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렸다는 의미다. 수업태도에 대한 작은 꾸중과 함께 용돈을 조금 더 보태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갔다.” (행 15:39)
전도여행을 앞두고 바나바와 바울은 마가와 동행하는 문제로 심하게 다투고 서로 갈라서고 만다. 초대교회는 서로 물건을 함께 쓰고, 눈물의 서신을 함께 돌려보며, 감옥에서 나와서도 서로 격려하는 코이노니아 그 자체인 교회인데 의외로 다툼에 대한 이야기도 꽤 등장한다. 물론 모세의 율법에 대한 문제, 이방인 구원에 대한 문제 등 굵직한 문제로 교회적으로 입장을 정리해야 하는 문제들도 있었다. 하지만 청년 한 명을 동행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심히 다퉈서 갈라서기까지 할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님은 이러한 교회 내의 다툼에 대해서 어떻게 보실지, 내가 사는 이 시대의 교회도 다르지 않아 특히 떨리는 마음으로 여쭤보게 된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었다는 구절의 원어를 찾아보면 ‘(좋은 일에) 자극’이라는 의미가 첫 의미로 등장한다. 더 찾아보면 ‘날카롭게 한다‘, ’예리한‘이라는 의미까지 나온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 27:17)
철은 싸워야만 빛나는 거였지 하는 생각이 든다.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여행에 억지로 마가와 동행했다면 바울에게도, 마가에게도 못할 짓이었을 것 같다. 바울은 바울대로 주님의 다루심이 필요했을 것이고 마가는 그전의 낙오에 대한 주님의 만지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섰다는 구절의 원어적 의미에는 ‘사이에 여유를 두다’라는 뜻이 있다. 주님의 일하심으로 바울, 마가 두 사람이 온전히 빛나기 위해 잠시 거리를 두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어제는 둘째 아이의 날이었다. 둘째는 관계지향적인 아이라 기분이 상했을 때 달래는 것이 쉽지 않다. 첫째는 목적지향적인 면이 있는 아이라 기분이 상해도 기분이 상한 원인만 해결되면 단박에 기분이 풀리고 안겨온다. 하지만 둘째는 기분이 상해버리면 어떻게 달래도, 기분이 상했던 원인을 여러 방법으로 처리해줘도 마음을 좀처럼 풀지 않는다. 달래주면 달래줄수록 더 징징거린다. 교회로 출발하기 전 둘째 아이가 아빠의 품에서 금방 달래진 것 같아 신랑에게 비법을 물어보았다.
“나는 달래면 달랠수록 더 징징거리던데 여보는 어떻게 달랜 거야?”
“내가 달래도 징징거려. 그냥 기다리는 거지, 뭐.”
대수롭지 않은 듯 전하는 말이 주님의 음성이었다.
충돌은 어쩌면 서로 빛나고 예리해지기 위해 필연적으로 필요한 부분일지 모른다. 갈등에 대해 중재하고 원칙을 세워야 할 때가 있다. 재판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어떨 때는 거리를 유지하며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서로 온전히 빛나게 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입는 시간이다.
신랑도 나도 유난히 갈등에 취약하다. 아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굉장한 스트레스다. 각자의 대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손에 들린 철이다. 날카롭고 예리한 철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상황을 주님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 의견이 서로 다른 지체에 대해서 서로 다름을 통해 나를 예리하게 하시고 또 상대 지체를 날카롭게 하실 주님의 일이 기대된다. 그리고 서로 기다려줄 때 바울이 옥중에서 마가를 특별히 부른 그 애틋함으로 교회로서 서로 빛나게 될 것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