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기다리지 않기
첫째 아이와 아침 산책을 나왔다. 홈스쿨링을 시작할 때 주셨던 소원은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아들이 사춘기를 지날 때에도 함께 걷는 홈스쿨링을 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 어느새 아침에 함께 걷고 있는 이 시간이 신기하고 감사하다. 산책을 갈지 말지 망설이던 둘째 아이도 뒤에서 달려오고 있다.
첫째에게 한 약속이 있어서 산책 나온 김에 동네 문구점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간단한 학용품 정도를 사주려던 참이었다. 둘째와는 하지 않은 약속이라 둘째가 따라나서면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같이 따라나선 둘째가 속상해할 것이 뻔해 첫째, 둘째 모두에게 사주려고 마음을 먹고 걸어갔다.
무인문구점에 도착한 지 20분이 지났다. 첫째는 금방 적당한 걸로 골랐는데 둘째가 계속 갈팡질팡이다. 기다리는 것도 힘든데 둘째가 계속 말도 안 되는 것들을 골라온다. 무슨 어린이날인 줄 아는 건지 몇만원이나 하는 큼직한 것들을 말이다. 안된다고 해도 계속 손에서 놓질 않고 무언으로 시위 중이다.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 둘째에게 나도 화를 터트리고 둘째는 아무 소득 없이 문구점을 나왔다. 혼자 학용품을 손에 쥔 첫째는 자기 때문인 것 같은지 계속 미안해한다.
며칠 전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의 문제로 다투고 갈라선 본문을 묵상했다. 주님이 여유를 두게 하시고 기다리게 하실 때가 있음을 묵상하게 하셨다. 주님이 서로를 빛나도록 다듬는 시간일거라고. 그런데 묵상 이후로 기다림이 쉽지 않은 일임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있다. 아이를 기다리는 일부터 교회 내에 의견이 다른 지체와의 일까지. 말씀대로 기다림이 필요한 시간임을 인식했을 때 잠시 평안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거리를 두고 기다려야지 했지만 거리 두기가 되지 않고 자꾸 부딪치는 것만 같을 때는 어떻게 하지?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행 17:26-27)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행 17:31)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확신’, ‘믿을 만한 증거(개역개정)’를 주셨다고 하신다. ‘증거’의 원어를 찾아보면 ‘가까이 잡다’라는 의미가 있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란 것은 멀리 두신 것이 아니고 가까이에 두셔서 잡을 만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거창해서 잡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주님이 나에게 더듬어 찾도록 가까이 두신 믿음을 기도 가운데 떠올려보았다. 금요철야기도 때 내 무릎을 베고 누워 큰소리로 찬양하던 둘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전도집회에 가서 사탕을 몰래 가져가려던 둘째 아이에게 그냥 사탕을 허락해 주고는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울며 기도했던 일이 떠올랐다. 내 손에 꽉 부여잡고 있던 고집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 은혜가 부어졌다.
둘째 아이는 그런 아이다. 끝까지 내 고집과 맞부딪쳐오는 아이. 내 스스로 내려놓지 못하는 고집을 조명하는 빛과 같은 아이. 내 신념대로 기르지 않아도 괜찮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통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끝까지 부딪쳐오는 아이다. 성벽 위의 나팔수 같은 아이라 둘째가 “우리, 가정 예배 드리자!” 할 때는 아무리 장난처럼 이야기해도 무게감 있게 들려서 예배드려야 할 타이밍인가 보다 싶다.
기다릴 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기다리는 일이 버겁게 느껴질 때 주님은 무작정 기다리라고 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주신다. 혹은 이미 주셨던 믿음을 기억하게 하신다. 둘째 아이가 버거운 요 며칠, 계속해서 둘째 아이에 대해 기도하게 하시고 글을 쓰게 하신다. 둘째 아이에 대해 주셨던 믿음을 꺼내어보니 아침의 상황은 내가 져야 할 타이밍이었다.
믿음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그러한 일이다. 무작정 거리를 두는 것이, 내 마음 편한 것만 구하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기다림이 아니었다. 나를 죽이는 순종이 필요할 때도 있다. 교회에서 계속 부딪쳐오는 지체에 대해서도 네 믿음이 어디 있니? 하고 물어오신다. 우리는 교회니까 괜찮아, 교회는 살아있으니까 괜찮아, 그 사람이 주님의 자녀니까 괜찮아 하는 믿음을 눈물로 고백한 적이 있다. 그 고백을 기억하게 하신다. 이제야 감당 안되던 그 상황 가운데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훈련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주님이 허락하신 기다림이 나를 빛나도록 다듬으시는 시간이 되는 순간이다. 믿음이 걸음을 인도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살 시기와 경계를 정해놓으시고 당신을 더듬어 찾게 하셨다고 하신다.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것의 의미에는 ‘문지르다, 현악기를 연주하다, 윙하고 울리다, 찬송하다’의 의미가 있다. 주님이 가까이에 두신 믿음을 더듬어 찾는 일은 악기를 연주하는 일과 같고 또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 된다고 하신다. 그렇게 찾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결국 구원에 대해 그리스도를 신뢰한다고 고백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