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을 이루는 노동
“엄마, 힘들어. 도와줘.”
첫째 아이가 자기 몫의 빨래를 개다 말고 울어대기 시작한다. 오빠들 공부를 봐주느라 밀리고 밀렸던 막내 공부를 이제 막 봐주기 시작한 터라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힘들다. 어느 정도 봐주고 거실로 나가보니 빨래들 사이에 몸을 파묻고 울고 있다. 엄마의 짜증도 오랜만에 폭발한다. 네가 입고 빨아놓은 옷 몇 개 개라는 게 그렇게 힘드냐, 그게 그렇게 많냐, 그냥 빨래 개지 마! 이런 식이다. 아이가 유난히 피곤해 하는 날, 하지만 엄마는 아이의 컨디션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화만 나는 그런 날이다.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행 9:6)
바울이 처음 예수님을 만난 장면이다. 처음 만나서 하신 말이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런 말이 아니고 ‘너 할 일 있어.’라니. 왠지 감정이 이입되어 ‘주님은 나를 일 시켜 먹으려고 부르셨나?‘ 하는 불편한 마음이 올라온다.
작은 교회는 일할 사람은 정해져 있고 일은 많아 한 사람이 한 번에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할 때가 흔하다. 그러다 보니 목사님이 뭐 하나 일을 만들어서 하자고 하실 때마다 ’왜 또 일을 만드실까, 피곤하다.‘라는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그런데 문득 하나님도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맡기시고 일을 시키셨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노동이 먹고살기 위해 하는 고된 일이 된 것은 아담의 불순종 때문이지만 동산을 경작하는 일,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 처음 맡기셨던 모든 일은 아담에게 기쁘고 즐겁고 거룩한 일이었을 것 같다. ’일‘은 아담을 부르신 소명이고 동시에 아담의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정체성이 정립된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을 생각할 때 주님이 맡기신 ‘일’은 아담이 든든하게 서있도록 하는 발판이었을 것이다. 바울을 만나자마자 하신 주님의 말씀 ’네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누가 말해 줄 것이다.‘(행 22:10)은 바울의 인생에서 에덴의 회복과도 같은 말씀일지 모른다.
선진국에서는 충분한 재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상으로 복지를 제공하지 않고 최소한의 노동을 통해 얻어 가도록 복지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노동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나를 일 시켜 먹으려고 부르셨나?‘하는 생각은 어쩌면 인권에 대해 왜곡된 시선으로 보게 하는 인본주의의 뿌리에서 출발한 생각일지 모른다. 알게 모르게 내 눈을 가리고 있는 인본주의의 덮개가 드러나 벗어지길 기도해오고 있었다. ’일‘이란 것에 대해 다시 보라고 하신다.
첫째 아이가 눈물을 닦고 학원에 갔다. 힘들어하던 첫째 아이가 계속 눈에 밟혀 집안일 면제권이나 공부 1과목 면제권 등 쿠폰을 만들어서 쓰게 해줄까 싶었다.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제안하자 힘들어도 그냥 하겠다고 한다. 그런 쿠폰 안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결국 힘든 날은 공부를 조금 줄여서 하겠지만 집안일은 계속하기로 의논이 되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이 나의 정체성이고 일상 가운데 거룩을 이루는 방편이라고 하신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집안일 훈련을 받으며 자라진 않았다.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맡아 하며 자란 우리 아이들은 나와 다르게 거룩함을 이루는 훈련을 일찍 시작한 지도 모르겠다. 힘들면 면제해 줄게 쉽게 이야기한 제안이 그렇게 단번에 거절된 이유는 주님이 맡기신 ‘일’이 이미 아이 속에 거룩함을 이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