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뒤에서

by 푸른새벽

지난 휴일 첫째 아이의 첫 농구대회에 다녀왔다. 꽤 먼 곳의 경기장에서 아침부터 하는 경기라 새벽부터 준비로 설쳤다. 경기장은 규모가 있는 편이라 관중석이 있고 대기팀들이 몸 푸는 장소도 따로 갖춰져 있었다. 농구교실 아이들이 코치님과 몸을 푸는 모습을 보는데 귀여웠다. 덩치 큰 아이들도 섞여있어 귀여울만한 장면은 아닌데도 아이들이 마냥 귀여웠다. 진지하게 몸을 풀면서도 얼굴이 모두 해맑다. 대회로 인한 긴장감보다는 휴일에 나와서 농구하는 재미가 모두의 얼굴에 역력하다. 실력이 출중해서 나오는 여유는 아니었다. 한참 경기 진행 중에는 우리 아이들 팀이 슬램덩크의 북산고 같다는 즐거운 착각도 했다.


우리 아이들 팀은 총 3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다. 아이들 체력이 조금 걱정되었다. 그런데 가쁜 숨과 시뻘게진 얼굴로 너무나도 진지하게 뛰고 있다. 이기고 있는 경기가 아니라 신나서 뛰는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걱정을 품었던 자리에 존경스러운 마음이 자리 잡는다.


두 경기를 연달아 졌지만 대기시간 아이들의 얼굴이 여전히 밝다. 그런데 첫째가 갑자기 대기장소를 빠져나온다. 어디로 가는지 무거운 문을 열고 나간다. 관중석에서 얼른 내려와 첫째를 찾으러 갔다. 다시 돌아온 아이가

“엄마, 화장실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화장실 반대쪽에 있어. 같이 가자.”

앞장서서 화장실로 데려갔다. 들어갔다가 금방 나온 첫째가 움직임이 급하다. 곧 마지막 경기가 시작할 것 같아서다. 관중석을 통과해서 대기실로 가는 길이 많이 복잡했다. 길을 막고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화장실로 올 때도 마찬가지여서 인파를 헤치고 길을 터줬던 참이었다.

“엄마가 먼저 갈까?”

“아니, 괜찮아.”

이번엔 첫째가 앞장서서 사람들 틈을 빠져나간다. 의외로 한 무리의 사람들만 피하고 나니 금방 길이 트인다. 재빠르게 대기실로 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멀어져 간다.



굳이 내가 고집해서 앞서 걸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해 본다. 한 무리만 지나면 길이 열리는데 엄마가 아이의 앞에 섰다면 뒤에서 걷는 아이의 마음이 더 급해질 뻔했다. 그동안 길을 내주는 것만이 아이의 걸음을 수월하게 하는 방법인 줄 알았다. 내가 먼저 인파를 헤치고 장애물을 치워주고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길을 내주는 부모가 아니라 뒤에서 걷는 부모가 돼야 하는구나 싶다.


믿어주는 부모라는 말이 무책임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믿어줄 수 있는 것은 그전에 이미 아이 안에 선한 것들을 부지런히 심고 기경해놓았기 때문이다. 부지런하고 성실했을, 지금보다는 조금 어린 부모의 모습을 이제는 가늠해 볼 수 있다. 아이를 믿어준다는 것은 심은 것들의 열매를 바라본다는 의미임을 이제는 안다. 아이가 자란 만큼 부모도 다듬어지고 자라서 이제는 믿어주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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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지으신 것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에도 존재하지만 관계 안에 있기도 하다. 아이 자체를 아름답게 만드셨지만 부모와 자녀의 관계 가운데에도 아름다움을 숨겨놓으셨다. 씹고 삼키는 것마저 가르쳐야 하는 아가시절을 지나 부모의 손을 떠나 마음껏 달려 나갈 때까지 아이가 자라는 만큼 부모도 자란다. 관계 가운데 숨겨놓으신 아름다움이란 그러한 것이다. 혼자 자라지 않고 ‘서로를 통해’ 자라도록 지어놓으신 섭리.


막내와 드라이브를 갔다가 아직 카시트를 쓰는 막내를 들어서 내린다. 좁은 주차장에서 나오다가 사이드미러에 곧잘 머리를 부딪치는 막내를 위해 부딪칠만한 모서리를 손으로 가려준다. 자그마한 막내도 언젠가 첫째처럼 내 손을 떠나 나풀나풀 날아갈 것이다. 그때도 나는 아이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 아니라 뒷짐 지고 뒷모습을 바라봐야할테다. 그것은 서운함이나 아쉬움이 아니라 주님이 숨겨놓으신 아름다움이 싹 틔우고 열매 맺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감동일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의 아름다운 열매가 부모인 내 안에서도 풍성해져있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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