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린다는 것은 나를 알아간다는 것

by 푸른새벽

드디어 오랜 시간 끌어오던 육아휴직을 끝내고 퇴직을 맞이했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는데 시어머님은 혹시나 있을 아쉬운 마음을 위로하시려고 꽃다발을 보내오셨다. 아직도 활발하게 일하시는 시어머님보다 내가 먼저 퇴직하다니 퇴직을 축하하는 꽃다발을 받는 기분이 묘했다.


육아휴직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다 퇴직한 것은 아니었다. 서운한 마음도 어떤 아쉬움도 없었는데 괜히 신랑은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자고,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물어온다. 대뜸 라면 먹고 싶다고 하자 어이없다는 표정이 답으로 돌아온다.


막내가 아토피가 심해 두 오빠들은 다 먹는 것들을 눈앞에서 못 먹을 때가 많다. 별말 없이 참아내는 막내가 안쓰러워 엄마도 같이 안 먹는 것으로 위로해 왔다. 오빠들이 라면을 먹어도 막내랑 엄마는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먹는 식이다.

“엄마 한 젓가락만 먹어보자.”

몰래 한 젓가락 먹어보려고 해도 절대 안 된다고, 나도 못 먹는데 엄마도 안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라면을 원 없이 먹어본 기억이 손에 꼽힌다.


라면에 양파, 대파 듬뿍 넣고 계란 풀어서 양껏 먹고 싶었다. 막내에게 억지로 동의?를 구한 후 퇴직 기념으로 라면 한 그릇을 내 마음대로 끓였다. 야채를 싫어하는 둘째, 계란을 싫어하는 첫째 때문에 참 오랫동안 못 먹어봤던, 내가 좋아하는 대로.


다음날은 신랑이 도저히 미안해서 안 되겠다며 억지로 외식을 데리고 나갔다. 뭐 먹고 싶냐는 물음에 역시 며칠 전 첫째가 짜장면 노래를 부른 게 떠올랐다. 아이들이 많이 먹지 않다 보니 늘 남기는 음식이 아까워 욕심대로 주문해 본 적이 없었다. 도착한 식당에서 처음으로 곱빼기를 시켜봤다. 다 먹고 나서야 역시 난 짜장보다는 짬뽕. 다음에 오면 꼭 짬뽕시켜야지.


그날 저녁, 신랑과 동네를 걷다가 늘 지나치기만 했던 마트에 들러보았다. 운동 겸 걷는 길에 목이 말라도 집이 금방이라 굳이 마실 것을 사러 들리지 않았었다. 오늘만큼은 내 욕심대로 다 해보자 싶다. 단 음료와 심심한 음료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단 음료를 계산해서 나오는데 한입 먹자마자 후회가 됐다. 으, 너무 달아. 욕심을 내는 김에 다시 들어가 심심한 음료도 사들고 나왔다. 누룽지차. 음, 역시 이 맛이다.



결국 퇴직할 것을 육아휴직기간만 길었다. 욕심부리지 않아도 됐을 기나긴 욕심 한 조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욕심부리지 않았던 조각조각들을 하나씩 손 위에 올려놓아보았다. 아이들이 좋아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처럼 쥐고 있던 조각은 이제는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비워내니 이제는 나 자신이 보인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은 아이들에게 온통 매여 나 자신은 없는 것처럼 사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양손 가득 쥐고 있던 미련을 내려놓으니 이제야 내가 보이는 시간으로 들어온 것 같다.


달고 자극 강한 것이 나랑 안 맞다는 것을 오랜 시간을 지나 깨닫는다. 분명 결혼 전에는 17차 같은 심심한 음료를 입에 달고 살던 시간이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매여 사는 시간 속에서 단 음료만 찾으며 갈급하게 살아온 것 같다. 한 길로 방향을 온전히 돌리니 이제야 나를 알고 나를 기억해 낸다. 이 길을 걸으면 나란 사람은 없어질 것만 같았는데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태초에 나를 지으신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나 보다. 나를 아시는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부르시는 길, 그 분만 믿고 걸어갈 길.


내 손 위에 남은 조각들을 들여다보았다.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조각들. 그리고 이 길을 걸으며 내 손 위로 새로운 조각들을 올려주실 것이다. 그 조각조각들로 만들어가실, 그분의 그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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