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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 Aug 16. 2023

열정만큼 깊은 상실, 슬럼프의 시작과 끝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는 중이다. 길지 않은 에세이인데 아껴읽느라 하루 이틀에 한 챕터만 읽는 중이다. 하루키가 성공한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루틴 러너로 느낀 점들을 써낸 에세이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이다. 앞부분에도 좋은 것들이 많았지만 요즘 유독 공감되는 부분, 'runner's blues'에 대해서 몇 가지 가져와보고자 한다.


하루키는 62 마일을 뛰는 울트라 마라톤에 참가한다. 장장 11시간 45분이나 걷지 않고 뛰었다고 한다. 다리가 아프니 주먹을 쾅쾅 쳐대며 계속 달리기를 하여 오히려 손목이 부어버렸다고. 그렇게 온몸이 소진되어 가는 상황에서 하루키는 기계를 돌리듯 온몸의 근육을 달래고, 혼내며 달리다가 종국에는 그의 의식과 몸만이 존재하는 상태에 들게 된다. 해내야 하기에 '나'라는 의식을 선명히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기계처럼 여기며 의식을 부정하는 상태.


"There definitely was a being called me right there. And accompanying that is a consciouness that is the self. But at the point, I had to force myself to think that those were convenient forms and nothing more. It's strange way of thinking and definitely a very strange feeling - consciousness trying to deny consciousness.I am not a human. I am a piece of machinery. I don't need to feel a thing. Just forge on ahead."

"나는 분명히 나라고 불리는 존재가 있었다. 그것을 동행한 것은 또한 나 자신인 의식이었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느낌이었다 - 의식이 의식을 부정하는 것 말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기계다. 무엇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계속 나아가라."


그리고 이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한 하루키에게 또 한 번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가 시작된다. "러너의 블루스"


"Still the most significant fallout from running the ultramarathon wasn't physical but mental. What I ended up with was a sense of lethargy, and before I knew it, I felt covered by a thin film, something I've sinced dubbed runner's blues. I lost the enthusiasm I'd always had for the act of running itself. Fatigue was a factor, but that wasn't the only reason. The desire to run wasn't as clear as before. I don't know why, but it was undeniable: Something had happened to me. Afterward, the amount of running I did, not to mention the distances I ran, noticeably declined."

"울트라 마라톤이 끝나고 달리기라는 행위에 갖던 열정을 잃었다. 피로도 한 요소였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달리고자 하는 열정이 이전처럼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무언가 내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후 러닝의 양도, 거리도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하루키는 울트라 마라톤 이후에도 계속 마라톤에 참여했고 매일 달리던 루틴도 유지했다. 레이스를 끝내기 위해 꽤 괜찮게 훈련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꽤 괜찮은 정도'를 넘어서진 못했다. "But this was never went beyond the level of decent enough job"


"By ocmpleting the over-sixty-mile race I'd stepped into a different place. After my fatigue disappeared somewhere after the forty-seventh mile, my mind went into a blank state you might even call philosophical or religious. something urged me to become more introsepctive, and this newfound introspection transformed my attitude toward the act of running. Maybe I no longer have the simple, positive stance I used to have, of wanting to run no matter what."

"60마일 이상을 달리며 나는 다른 곳에 발을 딛게 되었다. 47마일 이후부터 내 피로는 사라졌고, 내 정신은 마치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를 공백의 상태로 들어갔다. 무언가가 내 내면을 성찰하도록 몰아붙였고, 이런 새로운 성찰이 러닝이라는 행위에 대한 내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아마도 나는 이전처럼, 어쨋던 달리겠다고 원하던, 단순하고 긍정적인 태도는 더 이상 아닐지도 모른다."


"My lifestyle gradually changed, and I no longer considered running the point of life. In other words, a mental gap began to develop between me and running. Just like when you lose the initial crazy feeling you have when you fall in love."

"내 삶은 점차 변했고 러닝을 내 삶의 특별함으로 더 이상 여기지 않게 되었다. 다른 말로, 나와 러닝 사이에 정신적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초기의 미친듯한 감정을 잃는 바로 그것처럼 말이다."







즐거운 일은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우리가 비록 '이유 없이', '나도 모르게' 열심히 하고 도전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이 그 행위를 계속하도록 만든다. 내게는 요가가 그랬고, 연구가 그랬다. 요가나 연구의 정의 같은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있다. 요가나 연구는 내 삶에 깊숙이 들어와 열정을 느끼게 했고, 매일 일정 부분의 시간을 - 그러니까 내 삶을 - 쏟게 했다. 그러나 내가 왜 그것들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좋아하는지는 명확히 설명할 순 없었다.


연구나 박사과정을 하라고 시킨 사람도 없었다. 도덕도 의무도 아니었다. 기쁨, 열정과 사랑으로 자연스레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박사과정이란 것은 내 사랑과 열정, 내 단련의 능력을 시험하는 무대이자 시간이다. 단순히 결과를 보이고 인정받고, 내 꿈을 이루는 시간만은 아니었다. 하루키의 62마일처럼. 그리고 그 '62마일'을 뛰기 위해 나는 내 정신이 나를 기계처럼 운용하고 몰아붙이고, 나의 의식이 나의 의식을 부정하는 단련을 해야 했다.


연구를 하며 하나의 부족함, 하나의 어려움을 마주하고 해결해 나가면서 괴롭고 힘들었으며, 내가 싫기도 했고, 강박이나 우울 같은 것을 겪기도 했다. 요가 역시, 6개월간 부상에 아파하기도 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괴로웠다. 어느 길목에서 큰 성취감을 느낄 때는 행복하고 기쁘고 열정적이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어느 정도 괴로워도 참고 해야하는 길목이 그보다는 많았다. 그 트라우마들은 몸과 정신의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열정이나 사랑 같은 것으로 시작되었기에, 깊은 상실을 겪는다. 열정과 사랑의 깊이만큼, 이겨내야 하는 고통의 깊이만큼, 획득하는 기쁨만큼 상실도 깊다.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 꿈꾸는 즐거움이 없어지는 것. 그것이 권태가 되고 무기력이 되고, 우울이 된다. 삶은 약간은, 빛이 바랜다.


연구도, 관계도, 소비의 즐거움도 무엇도. 강도와 길이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모든 것들이 휘발되거나 상실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삶은 그렇기에 너무 길고 길다. 무엇을 하며 삶을 살아야 할지 때로 고민한다. 책을 읽으며 나와 사람을 이해하고, 운동을 하며 신체를 단련하고 좋은 에너지를 받으며, 연구를 열심히 하며 성취감과 물적 보상, 존경을 받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만나며 내 세계의 유한함과 그로 인한 견디기 어려운 권태를 이겨내는 것. 그게 현재의 나다.


하루키는 이후 서서히 러닝에 대한 즐거움을 회복하였고, 이 날아가버릴지 모르는 애틋한 열정과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해내고 있다고 했다. 나도 서서히 다시 즐겁고 아름다운, 반짝이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언젠가 찾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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