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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루스 Apr 25. 2016

리서처, 고객의 진실에 다가가는 사람

인하우스 제품기획자의 자기고백

나는 UX리서처이자 컨셉기획자다. 프로필에는 그렇게 쓰고, 사람들을 만나면 신제품을 기획하고 고객조사하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대부분 애매하지만 정중한 미소를 지어준다. 일반인에겐 좀 낯선 직업인 탓이다.


그럼에도 한마디로 줄여보면,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기획자보다는 리서처에 방점이 찍힌 정의다.

지금 직장으로 이직할 때의 기준도 '리서치를 계속 할 수 있는가'였다. 고객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듣을 수 있는가?마케팅이나 홍보 집행으로 끝나는게 아닌 그들의 진짜 반응을 보는 일을 하고 싶었다. 즉 내가 하는 리서치는 자료조사가 아닌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사용자 조사보다 중요한 고객 조사


5년전, 지금 직장으로 옮겼다. UX 직군으로 지원했는데 최종 배정받은 업무는 기획이었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이 기획이란 걸 깨닫고 받아들이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웹기획처럼 산출물의 형태와 쓰임새가 명확하지도 않은,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비디자이너 출신의 인하우스 제품 컨셉 기획자.


UX 리서치로 커리어를 시작한  나로서는 '사용성'의 가치를 폄하당하고 '팔리는 제품'을 만들라고 압박당하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몇 년그렇게 정체성을 고민했다.


시간이 흘러 이해하게 됐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해결하고 싶은 문제, 추구하는 가치에는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상 최대의 가치라고 생각했던 사용성은 여러가지 가치 중의 하나이자, 당연한 기본이었다.

대신 방황의 대가로 고객 관점과 사업 관점이라는 양날개를 얻었다. 기획의 중요성도 이해한다. 고객의 진실을 알아냈으면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인지라, 중심을 꽉 잡아주는 컨셉이 필요하다는 것도 많은 프로젝트를 통해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를 기획자라기 보다는 리서처라고 생각한다.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하면 사람들이 묻는다. 왜 리서치가 하고 싶어요? 그 때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대답은 역시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기질이 잘 맞이서이기도 하다.


리서치 잘하는 성격은 따로 있다.


개인적인 경우를 너무 일반화하면 안되겠지만, 같이 일하는 리서치 회사 분들을 보면 비슷한 성향들이 분명 있다. 좋게 말하면 지적인 성실함이고,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 부족한 성격이다. 상사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 표정이 굳어져 더듬더듬 토를 달고는, 뒤돌아서서 후회하는 타입이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꾸준하고 성실하게 리서치를 잘한다. 즉 자기만의 진실을 추구해간다. 클라이언트에게도 아닌 건 아니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해 바른 방향으로 일을 끌어간다. 대신 지나치게 꼼꼼하고 자기 스스로에게 정직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분석전문가가 말하는 빅데이터>라는 책을 읽는데,  한 전문가가 데이터를 철저히 관리하고 정직하게 분석할 것을 강조하는 거다. 다들 구체적인 방법만 논하는데 양심적 태도를 말하니 묘한 동질감에 확인해봤다. 그 챕터 저자가 리서처 출신이었다.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들은 안다. 이게 반쯤은 과학의 영역이지만 절반은 직관과 영감, 해석의 영역이라는 것을. 그 데이터가 고객 인터뷰 결과든,

설문조사한 정량데이터나 트위터/블로그를 긁어모은 텍스트건 마찬가지다.


정직하지 않다면 사전설계, 수집 과정에서 얼마든지 왜곡이 일어날 수 있으며 귀에 걸면 귀걸이  해석도 가능하다. 그런걸 천성적으로 견뎌내지 못하는 완벽주의자가 리서치를 잘한다. 바꿔 말하면 직업윤리가 중요한 업무다. 


그런 고집이 없으면 지루하고 단조로운 작업을 잘 견뎌내지 못한다.  


리서치는 견뎌내는 것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없어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30명의 그룹 인터뷰를 한다고 치자. 5명씩 6그룹이면  최소 이틀은 리서치룸에 갇혀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메모를 해야 한다.  


3번째, 4번째 그룹으로 넘어갈수록 사람들은 고만고만한 비슷한 얘기들을 한다. 이를 잘 아는 상사, 유관부서 사람들은 한두 세션만 듣고 가버리거나 앉아서 딴청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면 제발, 그냥 가줬으면 좋겠다.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삶과 경험과 고민을 기록한다. 이 소중한 기회를 방해받으면 속상할 뿐이다. 한명 한명을 개성있는 개인으로 분석하는건 전통적인 마켓 리서치 접근법은 아니다. 오히려 문화인류학적 접근법에 가깝다.


그럼에도 리서처로 살아가긴 어렵다.


그토록 재미있어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으면서, 왜 이런 늙은이의 회고 같은 글을 쓰고있는 걸까?


리서치만 하면서 늙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나라 개발자들의 고민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우선,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이 일을 단독 포지션으로 두지 않는다. 리서치는 기획자나 디자이너의 관리 업무로 여겨지고, 대개 리서치 전문 회사에 외주를 준다. 즉 인하우스에서 리서치를 하려면 차라리 UX디자이너 직군이 더 유리하다. (안타깝게도 난...문과 출신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리서치 전문 회사는 생존경영을 위해 한사람이 두 개씩 프로젝트를 뛸 때가 많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실무에서 손을 떼고 관리와 영업에 집중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니 평생 실무자로 살고 싶은 리서처에게 어떤 선택이 있을까? 현장에서 멀어져 여러 프로젝트를 관리만 하고 사내정치에 공들여야 하는 관리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이 시점에서 어떤 미래를 계획해야 하나?


기업의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시대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덩치 큰 기업, 거대공룡의 시대는 저물어간다는 사실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가져온 거대한 변화는 이제 우후죽순 생겨나는 참신한 서비스와 제품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스타트업과 스몰 비즈니스, 1인 기업가들이 몸소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가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나는 이 시대의 개척자들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는 과정에 나의 동참할 생각이다. 목표는 80살까지 현역으로 일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나에게 조금이라도 흥미가 생기신 분들을 위한 자기소개서이자, 길 떠나는 자의 출사표이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좋은 이들과 함께하는 여정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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