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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불 Nov 21. 2021

한 명의 사람, 한 명의 어른이 되기까지

운명론과 자유의지론의 사이에서

얼마 살지 않은 인생이지만 하나의 인생 속에서 저 아래 밑바닥부터 행복한 순간까지 여러 차례 거치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사람 관계라는 것이 그냥 오고 가는 것이 없다는 것,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것이다.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건, 내가 겪은 사건이 어떤 사건이었든 간에 그 현상 속에서 나는 '좋은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과 '진짜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주었다.




나는 운명론은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에는 예정되어 있었고,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혐오하던 사람이었다. 그 말은 나에게 "네가 그 끔찍한 일을 겪은 것은 너의 팔자야, 네 인생이 힘들었던 이유는 뜻이 있기 때문이야"라는 말로 해석되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어느 누가 자기 인생의 아픈 기억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싶겠는가. 내 생애의 가장 아픈 기억이 운명론적 관점으로 해석되다니, 나에게 참으로 잔인하게 다가왔다. 유독 내 인생만 모진 것 같을 때 그렇게 살아야 할 운명인가 보다 하고 체념하게 되는 순간이 아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그런데 두려움 속 고심 끝에 내린 나의 선택으로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에 따라오는 낯선 경험들을 내 삶 안에 들여보고, 그 안에서 오고 가는 인간관계를 거치면서 '인연/운명의 법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갈라지고 떠나는 관계가 있는 반면, 별 노력하지 않아도 곁에 있어주는 관계가 있다. 영원히 함께할 것만 같았는데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관계가 있는 반면, 그냥 그런 사이었는데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 관계가 있다. 몇 년 동안 마음이 통하던 사이었는데 어떤 일을 계기로 갈라지는 사이가 있는 반면, 얼마 보지도 않았는데 간간히 보아도 유지되는 관계가 있다. 온갖 상처를 냈는데 곁에 있으려는 관계가 있는 반면, 가까워지고자 최선을 다했는데 멀어지는 관계가 있다.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람 관계다.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 관계 속에서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자신을 소중히 대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자기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고, 자신을 소중히 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가끔 보면 이 또한 잔인하다. 지금 알게 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인데, 겪어보고 나서야 판단이 가능하니 말이다. 또 하나의 잔인한 것이 있으니, 여러 잔인함이 모여야만 사람 보는 눈이 생긴 다는 것이다. 마치 여러 가시들 사이에서 피어난 장미꽃이 된 것만 같다. 하지만 사람들은 드러난 장미꽃만 볼뿐, 그 안의 가시는 따갑다며 들여다보지 않는다. 제 안에도 가시는 존재하기 마련이거늘 왜 타인의 가시는 기피하는 것일까.



한국 드라마 굿닥터에 이런 대사가 있다.

차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의사가 된다고요.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의사란 무엇입니까?

좋은 의사? 어떤 게 좋은 의사일까 고민하는 모든 의사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다. 좋은 의사가 뭔지 고민하는 의사가 모두 좋은 의사.
그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상처가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남의 아픔을 헤아리려면 나부터 아파봐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아파할 거다. 그래도 괜찮을 거 같다.
난 사람들 속에 있을 것이고, 그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잘 살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고,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선한 마음을 환경이 멍들게 하여 나쁜 마음을 가지게 한다. 막살고 싶고, 행복 따위는 나와 거리가 먼 것 같고, 어떻게 살아도 이 삶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고, 모든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 같고, 그러다 결국에는 체념하게 된다. 나 또한 그 과정을 수천번을 다녀갔다. 행복해지는가 하면 나를 끌어내렸고, 편안해지는가 싶으면 날 건드렸고, 이제 좀 즐기는가 싶으면 깨뜨린다. 그렇게 천국과 지옥을 여러 차례 다녀갔다. 천국과 지옥을 수차레 다녀 가다 보면 지옥에 있는 자들과 천국에 있는 자들의 차이점이 보인다. 공통점은 모두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사실이다. 불구덩이에서 아픈 삶은 선택하는 것도 개인이고, 꽃밭에서 사람들과 웃는 삶을 선택하는 것도 개인이다. 어릴 때는 환경이 주어지지만, 성인이 된 우리는 환경을 선택해 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차이점 역시 개인의 선택이다. 지옥에 있는 자는 온갖 근거를 들이대며 그 안에 있으려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고, 천국으로 가는 자는 온갖 방법을 만들어나가며 그 안에서 벗어나려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지옥과 천국을 수차례 오가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면서도 강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현재의 아픔이 너무나도 힘들기에 돌이키고 싶은 순간들,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과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선택을 하면 다른 결말로 도달할 수 있을까. 나는 "글쎄요"라고 답한다. 우리가 후회하는 수많은 순간들로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그 선택 뒤에는 또 다른 선택이 있다. 또 다른 선택에서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할 자신이 있는가. 어떤 선택이 우리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과거로 돌아가는 영화들은 많지만, 그 영화들 속에서는 모두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 원하는 결과를 위해 과거로 돌아가서 선택을 바꾼다 하더라도 반드시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아무리 피하고 싶던 일이라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셋째, 최선을 다한 선택에 후회하지 말고, 선택 후 일어난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라. 과거의 상황을 돌이키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을 바꾸려고 하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 영화 테넷-



이 글이 운명론(결정론)에 대한 글처럼 보일 수도 있고, 자유의지론에 대한 글처럼 보일 수도 있다. 둘 다 정답이다. 세상은 양자역학의 법칙(물리학 용어이나, 쉽게 말해 둘 다 상호작용하며 공존한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에 따라 흘러가니 말이다.


인간은 약하다. 그래서 혼자 힘으로는 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한다.

인간은 강하다. 그래서 아파도 살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쓴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과정 속에서 인간은 한 명의 사람이 되고, 진짜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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