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실패를 뒤로한 출국

by 도시오리

오랜만에 브런치에 들어왔고, 확인해 보니 마지막 난임일기가 2021년이다.

2018년 겨울, 처음 병원에 난임병원을 찾았고,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시험관 시술은 실패와 실패를 거듭하고 어느덧 7년이 흘렀다.


"언니 난소기능 저하는 절대 포기하지만 않으면 돼요"

2021년 11월, 남편이 갑자기 미국 발령을 받게 됐다. 팬더믹을 보내며 번아웃이 오기도 했고, 통원과 출퇴근, 너무 당연한 듯한 초과근무와 주말근무를 병행하느라 회사를 쉬고 싶은 마음은 있었던 건 사실이다.

"미국 가는 거 괜찮아?" 남편의 질문에 나는 끄덕하면서도 첫마디는 "그럼 시험관은 어떡하지? 우리 아기 이제 못 가지나?"였다.


"쉬다 보면 생기는 사람들도 많아"


속도 모르고 하는 남의 이야기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나의 경우, 시험관을 하지 않으면 자연임신이 될 확률은 0에 가깝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날 위로해 주는 말이 감사하기도 했다.


남편을 먼저 미국에 보내고, 혼자서 아파트를 구하고 정착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퇴사 일정을 조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시험관을 계속했다. 제발.. 제발

그렇게 6개월을 떨어져 살았고, 채취와 이식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6월, 착상에 실패했다는 전화를 받은 동시에 이 소식을 남편에게 알리고 바로 1주일 후의 비행기를 끊었다.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던 날, 3월에 결혼한 (그때는 친했던, 지금은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친구가 전화를 했다. "뭐 해?" 결혼하자마자 허니문 베이비를 임신하고, 임신 소식을 바로 전한 친구였다. 전화기 너머로 친구는 임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처음 있던 일이었다. 다른 사람의 임신 소식이나 과정을 듣고 조금 우울해진 적은 있었는데,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냥 밝게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었던 기억이 난다. 난임은 내 마음도 감정도 흔드는구나. 내 한국의 기억은 시험관 실패로 가득했고, 실패한 이곳에서 더 있고 싶지 않고 남편과 내 집, 내 공간에서의 위로가 너무 필요했다. 비교할 대상도 없고, 실패의 기억도 없는 곳에 가서 새롭게 시작하자.


그렇게 미국, 뉴욕에 오게 됐다. 영원은 아니고 잠시.


야근과 통원으로 매일매일이 바빴던 나에게 갑자기 생에 처음으로 엄청난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뭘.. 하고 이 시간을 보내야 하지?'


매거진의 이전글채취 실패의 모든 과정을 겪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