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지개 경 Jun 26. 2018

김수영의 (책)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김수영-





시를 읽으면서 예전 문고본을 생각했다. 작고 앙증맞은 그것은 그에 걸맞은 글씨와 그림, 세로 문장을 지니고 있었다. 휴대하기 편해서 작은 가방에 넣고  다니며 자주 펼쳐보았던 책이다. 시인은 그 작고 누런 종이에 빼곡히 쓰인 활자를 보며 무한한 세계를 탐구하고 발견하고 상상하며 사유했을 것이다. 닳고 닳도록 책장을 펼치고 닫았을 시인의 형형한 눈빛을, 세상에 드러난  지식뿐 아니라, 감춰진 삶의 의미를, 마르지 않는 샘을 파듯 온 몸으로 깨우쳐 통찰했을 시인을 상상해본다.

    
 시는 마술처럼 순식간에 아름답고 슬픈 기억을  풀어놓는다. 바람도 잠든 숲속에서 큰 나무에 등을 기대는 순간 찾아온 눈부신 사랑은  설렘과 환희를 안겨주고 한순간에 사라진다. 마치 읽는 순간 녹아버린 아름다운 구절처럼,  닿았다 사라지는 봄눈처럼. 하지만 사랑은 결코 허망하지 않다.  부서지는 아픔을 견디고 꽃눈을 깨운 봄눈의 고귀한 사랑이기에.

     

     

     

     

     


매거진의 이전글 신경림의 (갈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