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

by 무지개 경

영화의 제목이 기름만 부으면 단번에 타오를 것 같은 무더운 여름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월에 개봉된 영화로 한 번 봐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아 극장에서 볼 기회는 놓치고 얼마 전 집에서 올레 tv로 보게 되었다. 사전정보를 통해 ‘버닝’은 이창동 감동의 8년만의 작품이며, 칸에서 좋은 평을 받았고, 문학작품이 모티브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를 다 본 후 원작이 궁금해서 바로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읽고, 또 비슷한 제목으로 문제가 된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헛간 타오르다」까지 읽어보았다

영화는 문학을 모티브로 해서 확실히 문학적이다. 세 인물이 만들어가는 사건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면에 감춰진 진실은 인물의 말과 행동, 또는 소재를 통해 암시적으로 드러나며 다층적 의미를 생산한다. 영화 속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메타포로 진실과 허구,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교묘히 뭉그러뜨리며 관객들로 하여금 무엇이 진실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찾도록 유도하고 있다.

인물들의 심리와 정신의 추이를 따라가다 보면 청춘의 혼란스런 내면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실체 없이 떠도는 무성한 소문처럼 알맹이 없이 헤매는 메마른 청춘들의 공허하고 슬픈 이야기이며, 불확실한 시대에 불안과 소외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주인공 종수(유아인)는 문창과를 나와 소설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비정하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무책임한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잠재돼 그의 표정은 항상 어둡고 무기력해 보인다. 툭 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피해 어머니는 종수가 어릴 때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폭력으로 수감돼 재판 중이다. 이 부분은 포크너의 소설 「헛간 타오르다.」를 차용한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는 없는 내용이다. 포크너의 소설에서 주인공 소년의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를 앓고있다. 작가는 전쟁에 대한 인간 내면의 분노를 인물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데, 그 행위가 아버지의 폭력이며, 헛간을 태우는 장면으로 나타난다. 소년의 아버지 또한 폭력으로 재판을 받는다. 벤이 어떤 소설을 쓰고 싶냐고 물었을 때 종수는 포크너라 말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얘기 같아서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소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종수는 현재 알바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그야말로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한 마디로 존재감 없는 가난하고 초라한 이십대 청춘이다. 그가 가혹한 현실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소설가로 성공하는 길일까? 현재로서는 미래가 불투명하고 어둡게 느껴진다.

종수는 배달간 곳에서 길거리 행사도우미를 하고 있던 옛 친구(전종서)를 만난다. 동병상련의 마음은 서로를 가깝게 만든다. 해미는 종수와 만난 자리에서 팬터마임을 배우고 있다며 귤 까기 마임을 보여준다. 신기하게 바라보는 종수에게 그녀는 말한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그녀는 종수에게 아프리카 여행을 가니 그동안 고양이 밥을 챙겨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종수는 그녀의 집 고양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의 팬터마임처럼 고양이도 실제가 아니란 의심을 해보지만, 사료가 없어지고 배설물이 있는 걸 보면 실제인 것도 같다. 그는 작고 빛도 들지 않는 해미의 빌라에서 그녀를 생각하며 마스터베이션을 한다.

해미는 여행에서 만난 벤이라는 남자와 함께 돌아온다. 벤의 정체는 처음부터 모호하다. 잘 생기고 말끔하고 예의바른 남자는 비싼 외제차와 멋진 집을 소유하고 있지만 부의 근원을 알 수 없다. 종수의 눈엔 젊은 나이에 하는 일 없이 소비만 하는 그의 생활이 이해되지 않는다. 게다가 별 볼일 없는 해미에게 관심을 갖고 접근한 것도, 해미와 자신을 파티에 초대해 같은 부류의 친구들 앞에 마치 자랑하며 선보이는 듯한 태도도 못 마땅하고 미심쩍다.

영화가 공포로 치닫는 것은 정체불명의 것들 때문이다. 벤의 집에서 발견된 여자들의 화장도구와 소지품, 그 안에 있었던 해미의 시계, 두 달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를 갖고 있다는 벤의 은밀하고 의미심장한 고백, 벤의 집에서 발견한 해미 것이라 짐작되는 고양이, 해미가 말한 우물의 존재,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추측과 짐작일 뿐 실체를 증명해주지 못한다. 알맹이 없이 부유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그것이 허위든 껍데기든 상관없이 그것에 믿음이 부여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실체가 되고 사실이 된다는 점이다. 종수의 의심은 이제 사실이 돼 벤이 해미를 살해했음을 확신하게 되고, 마침내 벤을 유인해 살해한다. 그리고 그의 차 속에 시체와 자신의 피 묻은 옷 등 모든 증거물을 넣고 불태워버린다.

하루키의 소설과 영화가 좀 다른 점은 소설 속 주인공 ‘나’는 종수와 같이 흔들리는 청춘이 아니라 삼십대 기혼자이며 소설가로서 안정된 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소설의 ‘그녀’도 해미처럼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이십대 여자로 거의 비슷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나’와 ‘그녀’의 관계는 종수와 해미처럼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아닌 ‘그녀’는 ‘나’가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상대이다. 종수에게 해미는 자신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특별한 존재이다. 그래서 그녀가 사라짐에 분노하고 좌절하며 극단적 선택을 한다. 하지만 소설 속 ‘나’는 ‘그녀’의 사라짐이 ‘그’가 헛간을 태우는 일처럼 불안하고 의문스러운 한 편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영화를 보면서 또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핵심이며, 중요한 은유적 표현인 ‘헛간을 태운다.’의미에 주목하게 된다. 벤이나 소설 속 ‘그’는 비닐하우스나 헛간을 두 달에 한 번씩 태운다고 했지만 실제 그것들이 태워지진 않는다. 그래서 누구나 그것이 실제 헛간이 아니라 다른 무엇임을측하게 된다. 소설을 보면 의미가 더 확실히 와 닿는 표현이 있다. ‘그’가 태우는 헛간은 거의 버려져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헛간이다. 바닷가의 외로운 헛간, 초라하고 볼품없는 헛간, 버려진 헛간, 있는지 조차 모르는 헛간, 태워지길 기다리는 그런 존재감 없는 인생들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너무도 섬뜩한 영화이며, 소설이다. 현대 사회의 우울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살벌한 경쟁 속에 꿈이 좌절되고,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알바로 전전하는 젊은 청춘들의 고달픈 삶을 엄마의 심정이 돼 바라보니 너무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영화는 결국 결핍과 충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누구나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을 어떤 방식으로든 충족하고 싶어 한다. 결핍은 마치 무심하게 버려져 있는 헛간처럼 내면에 잠재돼 있다가 욕망이라는 불씨를 만나 무엇을 불사름으로써 충족이란 이름을 얻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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