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사랑한 이들의 이야기 (클로저)

by 무지개 경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가? 누군가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나는 운명과 인연, 필연과 우연이란 만남을 포장하는 수단에 불과하고

결과에 따른 해석일 뿐이라 생각했다.


서로 열정적으로 사랑할 땐 필연적인 운명이라 하다가도 서로 싫어지거나 상처를 받게 되면 어쩌다 만난 악연이라 독설을 퍼붓기도 한다. (클로저)란 영화를 보면서 사랑은 운명이라기보다 각자의 선택이며,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욕망이며, 모순된 감정의 질곡이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 영화는 무척 로맨틱하게 출발한다. 사람들이 일터로 향하는 너무도 현실적인 시간에 마치 다른 세상에서 막 도착한 듯한 붉은 머리 아름다운 여인이 명랑하게 걷고있다. 운명적 사랑을 강조 하듯 호소력 짙은 싱어의 ‘난 너에게 눈을 뗄 수 없어’가 반복해 들려온다. 런던 도심 한복판에서 오직 그녀만을 응시하며 다가오는 남자가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여자가 택시에 살짝 부딪히고 남자가 달려와 여자를 일으킨다. 여자는 남자를 보고 ‘Hello, Stranger!’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남자는 여자를 병원에 데려가고, 이러저러해서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그들의 썸은 시작된다.

영화는 네 남녀의 사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현재 부고기사를 쓰고 있지만 장래의 꿈이 소설가인 댄(주드로), 뉴욕출신 스트립댄서인 앨리스 (나탈리 포트만),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왠)는 각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만 서로의 파트너에게도 관심을 갖는다. 영화의 제목 클로저처럼 처음 그들은 낯설게 다가온 사랑을 기대와 설렘, 기쁨으로 맞고, 열정적으로 서로를 탐닉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서로에게 익숙해지면서 사랑은 습관이 되고, 오히려 무관심한 타인이 돼 간다. 사랑의 주체인 타인들은 매력적이지만 또 비정하게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댄은 앨리스와 동거를 시작하고, 그녀의 삶을 소재로 소설을 발표한다. 그는 우연히 책표지에 쓸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사진작가 안나를 만난다. 댄은 앨리스와는 다른 매력을 지닌 안나에게 반하고 그녀를 유혹한다. 안나도 그에게 마음이 끌렸지만 이미 그에게 연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사랑을 거절한다.

댄은 어느 날 장난으로 안나인 척하고 의사인 래리와 채팅을 한다. 안나가 수족관에 잘 간다는 것을 알고 댄은 그곳에서 래리와 만나자고 한다. 물론 안나가 그곳에 올거란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안나가 수족관에 나타나고 래리와 만나게 된다. 댄이 둘을 이어준 셈이다. 엉뚱한 장난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안나와 래리가 진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됐으니, 이럴 운명 운운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영화 속 인물들의 사랑을 보면서 과연 이들이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애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에게 끊임없이 구애하는 댄, 남편이 있음에도 댄의 구애에 응대해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려는 안나, 안나의 외도를 알고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앨리스가 일하는 스트립 바를 찾아가 그녀를 유혹하는 래리, 물론 본능적으로 사랑에 대한 욕구가 한 사람에게만 향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상황과 감정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랑이 진실하다 말할 수 있을까? 둘 사이를 이어주는 두터운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맹목적 소유와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할 뿐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에 대한 믿음과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상대를 의심하고 질투하고 상처를 주고 받으며 모든 것을 사랑이라 합리화한다.

안나의 스튜디오에서 그녀와 앨리스가 만나던 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댄과 안나의 관계를 눈치 챈 앨리스는 슬픈 표정으로 안나에게 자신의 모습을 찍어주길 청한다. 안나는 그녀를 찍으면서 앨리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본다. 앨리스의 우수에 젖은 얼굴을 사진으로 남기면서 안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가엾은 아가씨에게 상처를 주지 말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뿐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앨리스에게 큰 상처를 준다.

그 뒤 안나의 사진 전시장에 앨리스의 눈물 흘리는 사진이 전시돼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그날 래리는 앨리스를 처음 보면서 그녀가 댄의 책 속에 그녀와 다름을 느낀다. 사실 댄은 앨리스
사랑한다면서도 그녀의 진짜 모습은 물론 그녀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댄은 사랑은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러니하게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사랑은 우유부단하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것이었다. 전시장에서 래리가 앨리스의 사진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 때 앨리스는 예술은 위선적이라고 말한다. 사진 속 인물의 고통과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만 아름다움으로 미화시킨다고, 그녀의 아픔이 느껴졌다.

댄을 잊기 위해서였을까? 안나는 래리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안나와 댄은 그녀의 사진 전시회를 계기로 다시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연인을 기만하고 밀애를 즐긴다. 댄과의 관계를 추궁하는 래리에게 안나는 사실대로 말하고 이혼을 요구한다. 댄도 앨리스에게 안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결국 앨리스와 래리는 연인에게 버림 받고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지만, 앨리스는 자신을 유혹하는 래리를 끝내 거절한다.

그런데 서로의 연인에게 가혹한 상처를 주고 힘들게 맺어진 사랑이건만 댄과 안나는 다시 이별한다. 외도의 단맛 쓴맛을 다 겪고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간 그들, 안나는 래리 곁으로 돌아가 그럭저럭 사는 일상적 삶을 택했지만, 앨리스는 자신과 래리의 관계를 의심하는 댄에게 실망하며 그의 곁을 떠난다.

영화가 끝났지만 뭔가 아쉬운 마음 떨쳐버릴 수 없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사랑의 방식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사랑,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사랑, 솔직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모를 그들의 고백, 그리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만을 중요시 여기는 태도, 믿음보단 의심이 그리고 상대가 솔직히 말했을 때 인정하고 수용하기보다는 거부하고 괴로워하는 등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이 모순적이고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영화는 이처럼 불합리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추구하고 실현해야 하는지, 사랑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지고 관람자 스스로 고민하고 성찰해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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