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또 다른 시작

여정의 끝에서

by 무지개 경

여행이 끝나자 심신의 긴장이 풀려서인지 나른함과 몽롱함, 뭔지 모를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런 와중에도 뜨거운 질문들이 말벌처럼 윙윙대며 귓가를 두드렸다. 여행 중에 품었던 의문의 답을 요구하는, 다양한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에 흠뻑 빠져 필요 이상의 열정과 의욕에 사로잡혀 과잉 소모된 감정이 낳은 그것들을 추스르고 수습하느라 피곤이 밀물처럼 엄습했다.

수려하고 웅장한 대성당을 보면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 예술성 높은 그림을 보면서, 멋진 광장과 분수를, 정교하고 경이로운 건축물을 보면서, 한결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복자와 지배자가 수없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주인을 맞이했을 견고한 인간의 피조물이 우뚝 서서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영원성을 추구했을 나약하고 미약한 존재들을 비웃는 듯, 세월 앞에 스러져간 부와 권력과 모든 탐욕의 무상함을 깨우쳐주는 듯 고고하게 서 있었다.

여행이라 할 수 있을까? 꽉 짜인 스케줄에 따라 타인과 함께 움직이면서 명소를 돌아보고 사진으로 인증 샷을 하며 연신 감탄사를 남발하는 것이. 물론 그것도 가치 없는 일은 아니다.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인간이 이룩한 위대한 창조물을 보며 경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수백 년 전 역사의 현장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보고 즐기는 것 외에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수많은 물음과 답을 찾아가는 사색의 시간이 없다면, 이 모든 보물들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아쉬운 여행이었다. 여유 있게 주변을 관찰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친한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은 그들을 조금 더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여행을 함께 가보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말, 이해가 됐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루 종일 같이 움직이고, 같은 방을 쓰고, 껍데기가 아닌 민낯까지 보게 되면,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그 사람의 어떤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생각지 못한 의외의 모습에 신선한 매력을 발견할 수도, 또는 실망할 수도 있다. 낯설고 새로운 환경은 자신은 물론 타인을 깊게 들여다보게 만든다. 새로움은 익숙해지기 전까진 어느 정도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에.

여행을 마치고 나니 또 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리라, 새롭게 시작하리란 예감, 더 깊숙이 그곳을 들여다 보고 싶은 충동, 눈 감으면 펼쳐지는 성스럽고 고풍스러운 대성당, 백설공주가 튀어나올 것 같은 아름다운 궁전,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인, 시간이 멈춰버린 그곳에서 마치 불멸의 영혼이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음을 느꼈던, 격렬하지만 고요했던 감정의 잔재들이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나태한 정신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여행의 끝이 남긴 한마디 '감사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일상은 권태롭지 않을 것임을. 재충전된 정신으로 다시 글을 쓸 수 있음을.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음을. 끝없는 도전과 여행이 닮았음을. 시작은 언제나 끝에서 다시 이뤄진다는 사실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