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고비아, 엘 그레코와 톨레도
마드리드에 도착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세고비아였다. 고대와 중세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한 채, 로마와 이슬람 문화가 뒤엉킨 이곳은 시간마저 빗겨간 듯 했다. 구시가 한복판에 자리한 로마 수도교의 방대하고 육중한 화강암 덩어리가 차갑게 시야를 파고들었다. 고대 로마인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거대한 축조물을 통해 그들의 삶을 상상해본다. 영토 확장과 더불어 부족해진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세운 장대한 목표 아래, 밤낮 없이 움직였을 민초, 노예들의 모습이, 그 고달픔이 떠오른 순간, 그들의 노동과 희생이 저 웅장하고 견고한 겉모습 속에 묻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바람처럼 스쳐갔다.
세고비아에는 귀부인처럼 사랑스럽고 우아한 대성당이 있고,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동화의 세계가 있다. 잠시 동심으로 돌아간다. 성이란 의미의 알카사르, 요새였던 곳을 증개축하여 수세기 동안 왕족의 거처로 사용했고, 이사벨 여왕의 즉위식, 펠리페 2세의 결혼식이 있었던 곳이라니. 디즈니 만화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성의 모델이 될 만 하다.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에 취한 것도 잠시 어느새 여행 내내 따라다닌 아쉬움에 시간이 발동을 건다. 잠시 머무는 구름처럼 다음 곳을 향해 떠나라고.
이베리아반도 중앙 카스티야 라만차 평원 언덕에 위치한 중세도시 톨레도는 마치 엘 그레코의 그림이(톨레도 전경) 살아 움직이는 듯 했다. 영혼의 화살이 금세라도 하늘을 향해 날아갈 듯 뾰족이 솟은 고딕체의 대성당이며, 전쟁의 역사가 두텁게 새겨 있는 우뚝한 모습의 알카사르, 도시의 절반이 탑과 성벽으로 이뤄진 경건하면서도 몽환적인 도시, 톨레도는 나에게 형언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고풍스런 집들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어 이룬 작은 골목은 초행길 여행자에게 자유로이 헤맬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듯 했지만, 시간의 제약으로 선물은 받지 못하고 어느 한 곳에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톨레도를 감싸고 유유히 흐르는 타호강의 가장 오래된 다리 알칸타라는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이후 전쟁과 자연재해에 의해 손상되고 파괴될 때마다 정복자의 손에 다시 복구됐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으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 속에 끈질기게 견뎌온 다리는 수많은 사연을 싣고 쉼 없이 달려와 다시 리스본을 거쳐 대서양에 이를 강물을 묵묵히 내려다보며 의연하게 서 있었다.
톨레도에서 엘 그레코 미술관을 방문하지 못한 것이 못내 섭섭했다. 이곳에 오기 전 카잔차키스가 쓴 작품에서 미리 만나본 화가는 천재적 재능을 지녔으며, 시대의 상투적 기법에 매몰되지 않고 독창적이며 주체적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고집한 실험적이고 개혁적인 사람이었다. 화가에 대한 카잔차키스의 열렬한 애정에 감염됐던 걸까?
그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차분한 마음으로 산토 토매 성당에 전시된 엘 그레코의 작품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감상했다. 자선 사업가인 백작의 장례식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상부는 하늘에서 내려 온 두 성인이 백작의 영혼을 데려가는 장면, 하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스테파누스가 백작의 유해를 매장하는 장면이다. 화가는 그림 속에 늘 자신을 그렸는데, 위의 작품에도 손바닥을 편 그가 눈에 띄었다. 이후에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엘 그레코의 작품을 좀 더 볼 수 있었다.
엘 그레코는 본래 그리스인으로 본명은 도메니코스 데오토코폴로스이다. 그는 크레타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이탈리아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했지만 그가 활동하고 정착한 곳은 스페인이었다. 특히 오랜 시간을 톨레도에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카잔차키스에 의하면 그는 말수가 적고 과묵했으며 도끼처럼 일격을 가하길 좋아했다고, 미켈란젤로에 대해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림은 그릴 줄 몰랐다.'고 혹평도 서슴지 않았으며, 천사의 날개를 크게 만들어 교회의 눈 밖에 났으며, 종교재판을 받으면서도 당당했다고 하니 그는 교회나 권위에 아첨하거나 굴복하지 않는 예술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엘 그레코의 그림 속 빛은 칼처럼 날카롭고, 인물들은 창백한 무아경의 유령처럼 보인다. 그는 현상 이면에 본질, 영혼을 추구하여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육체를 괴롭히고, 잡아 늘려 길쭉하고 괴이한 형상을 만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그림은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법칙이나 규칙이 아니다. 그림은 개척이다. 그것은 영감이며, 절대적으로 개인의 에너지다.''
톨레도는 내 마음 속에 엘 그레코를 심어 주었다. 그림에 문외한인 나에게 그림도 문학처럼 가슴 설렘과 앎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화가의 사상과 고뇌, 삶의 여정을 들여다 보고 그를 이해하고 싶어질 때,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며, 그것과 진정으로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