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특별한 선물

by 무지개 경

무슨 말부터 써야 할까. 눈을 감고 자판을 두드린다. 손끝에 전달되는 자판의 촉감이 새롭다. 정신을 집중하여 키보드에 새겨진 낱자의 위치를 찾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다. 제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감각만으로 글을 빠르게 쓰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 쓰다가 정신이 흐트러지면 무의식적으로 눈이 떠진다. 생각과 다르게 오타가 많다. 평소 타자 실력도 없는 데다 눈을 감고 쓰니 당연하다. 하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좋아질 것이다. 평소 하던 습관대로 살아서, 해보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음을 새삼 느낀다. 평소라면 쓸데없이 눈을 감고 자판을 두드려볼 생각을 했을까. 세상에 해보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 사소한 호기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는 것, 절실함이 없다면 그저 웃으며 가볍게 스쳐갈 수 있는 것들인데.


전부터 내 눈에만 살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있다. 눈을 통과한 순간 나만의 기억과 추억으로 살아 숨 쉬는 것, 그래서 언제든지 다시 눈으로 재현되고 아련한 상념으로 되살아나는 것들, 하지만 이건 다르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나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괴롭히는 불쾌한 점들, 심지어 눈을 움직일 때마다 다양한 모양으로 바뀌는 것이 너무 징그럽다. 안과에 가서 생리적 노화현상의 하나인 비문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달리 고치는 방법이 없으니 그저 무시하고 살라고 했다. 그처럼 단순하고 명쾌한 처방이 있을까? 그래서 그렇게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것을 놓아주니, 아무리 눈앞에서 알짱거려도 보아주지 않으니 마법처럼 내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


비문증이 문제가 된 건 최근이다. 오랜 시간 무시당하고 살아온 것들은 언젠가 반격을 하는 법이다. 무엇이든 언제나 늘 같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건만, 불행히도 그것이 평소 자리를 이탈하거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공격을 할 때야 비로소 눈길을 주고 그동안 박대하거나 소홀했음을 깨닫게 된다. 당연하던 것을 잃게 되면 처음에는 쉽사리 인정하지 못한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며 왜?라는 바보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늘 옆에 있어 잃을 거라곤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박탈과 배신에 분노하게 된다. 그러나 곧 알게 된다. 소중한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함부로 대한 자신의 자만과 이기심을.


책을 읽고 있는데 그동안 안보이던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 띄게 많아진 것이다. 무엇이든 평소와 다를 때 의아함을 갖거나 눈치를 채는 법이다. 처음엔 무시를 했다. 하지만 갈수록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점들뿐만 아니라 거미줄 같은 것들이 휙휙 지나가고 급기야 눈에서 번쩍 빛이 터지는 야릇한 경험을 하였다.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안과에 갔더니 망막박리가 일어났다고 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엉겁결에 아니 두려움 속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신마취를 하고 내 것을 누군가의 손에 맡겼다. 운명의 신에게.


수술을 하고 나니 눈으로 보는 것보다 귀로 듣는 것에 더 몰두하게 된다. 눈을 감고 듣는 소리와 손으로 만지는 촉감을 통해 눈으로 보면 간과하기 쉬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진실과 보물이 왜 감춰져 있는지, 진정한 가치는 쉽게 얻어지지 않음이 다 같은 맥락임을 느끼게 된다. 수술은 잘 됐고 보는 데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이번 일은 나에게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삶은 어느 순간 우리에게 특별한 체험을 선사한다. 선사란 긍정적인 느낌의 단어이다. 그래서 대개는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을 선사하는 삶이 고마울 뿐이다. 하지만 삶은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우리를 사랑하고 생각마저 깊어 때론 안일한 일상에 만족하며,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련이란 큰 선물을 주곤 한다. 시련과 역경이 삶이 주는 특별하고 가치 있는 선물이라 함은 언뜻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만약 내가 눈 수술을 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눈의 소중함을 모른 채 눈을 혹사할 것이고, 잠시 눈을 감고 주변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눈감고 컴퓨터 자판을 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이처럼 경쾌한지도 미처 느끼지 못했겠지. 누군가에겐 극히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너무도 간절하고 소중한 일이 될 수 있음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나에게 삶은 특별한 선물을 통해 소중한 것을 잃지 말도록 따끔한 경고와 더불어 따스한 조언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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