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수많은 것들이 오고 갔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찾아왔고, 또 조금 더 시원한 바람이 간간이 불어왔다. 짧은 시간 동안 똑같은 느낌의 바람은 없었다. 초저녁 해가 남은 빛을 퍼뜨리며 스러져 가는 모습은 하루 중 가장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순간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풍경을 어떻게든 포착하여 그림이나 언어, 아니 무엇으로든 섬세하게 묘사하고 싶은 강한 욕망이 일었다. 무수히 많은 언어들이 머리와 가슴으로부터 튀어나와 아딘가에 부딪혔다가 다시 돌아왔다.
용기를 내어 그를 바라봤다. 마치 고요 속에 작은 소리와 움직임이 크고 선명하게 느껴지듯 그의 표정과 행동이 침묵 속에서 무척 확연히 그렇지만 몹시 생경하게 들어왔다.
왜? 평소에 몰랐을까.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는 모습, 별다른 의미 없이 반복적으로 코를 만지는 행동, 간헐적으로 들리는 깊은 숨소리, 그것은 분명 습관일 텐데, 긴 시간 동안 함께 해 온 사람의 사소한 행동이 침묵과 고요 속에 낯선 풍경만큼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게 참으로 이상했다.
돌아보면 그와 나 사이 너무 많은 말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하는 말들이 허공을 돌며 서로 충돌하고 어딘가로 갔다가 다시 튕겨져 나오는데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다. 어떤 때는 말들이 장벽을 쌓았다. 소화되지 않은 말들이 많을수록 장벽은 더 두터워졌다. 말들은 장벽을 넘지 못하고 돌아오거나 자세히 들을 수 없는 말들은 왜곡되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귀를 스쳐 지나버리기도 했다. 고요도 아이들이 성장하는 속도만큼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고요가 찾아오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었다. 잎이 흔들리는 소리, 이름 모를 새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자연이 내는 소리만이 우리의 침묵 속에 들어와, 마치 이어폰을 서로의 귀에 하나씩 꽂고 음악을 듣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로의 마음속 음악이 되었다. 침묵과 고요 속에서 모든 감각이 서로를 향해 열려 있었다. 오롯이 그와 나만이 이 세상에 남겨진 것 같았다. 침묵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정과 이해의 감정들이 솟구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랫동안 그를 알았던 것보다 더 깊이 그가 내 맘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