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지개 경 Jan 13. 2019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책은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

헤리엇과 데이비드가  만난 것은 직장 파티에서였다. 두 사람 다 특별히  가고 싶던 파티는 아니었지만, 만나자마자 둘은 이야말로 그들이 기다리던 일이란 것을 단숨에 알았다.

 

 그들이 기다리던 일이란 대목이 관심을 끈다. 자석처럼 강하게 끌어당기며, 서로를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엇인지, 첫 문단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시끄럽고 약간은 퇴폐적인 파티에서 그들은  흔히 말하는 천생연분, 운명적 만남을 이루었다. 해리엇은 데이비드를 보면서 마치 거울 속 자신인양 느꼈다. 사실 그렇다. 닮은 존재는 직감적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많은 무리들 속에 결코 낯설지 않은 모습과 행동에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시끄럽고 활기찬 파티에 어울리지 않는 몸짓과 표정, 깊은 생각에 잠긴듯한 고요함, 마치 파스텔톤의 인상파 그림처럼 주변의 사물과 융해된  희미했지만, 확실히 무리와 다른 그들만의 세계가 구축된 이방인 같았다.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현시대의 유행과  맞지 않는 비호감의 요소, 보수적 사고 방식, 수줍음, 절제와 감정적 까다로움 등 주변 사람들에게 고루하고 답답한 인상을 주는 자질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그들을 괴짜로, 변종으로  만든 것은 섹스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였다. 그들은 시대가  변해 유행처럼 번지는 자유분방한 섹스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었고, 실제 행동도 그렇게 했다. 주변에서 어떤 오해를 받기도 한 그들의 섹스에 대한 태도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것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섹스는 건강한 가정을 위해 신성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남다른 태도가 그들을 맺어주었다.


 헤리엇과 데이비드는 서로에 대한 어떤 탐색 과정도 없이 곧바로 결혼했다. 그만큼 서로가 추구하는 목표가 동일했기 때문이다. 헤리엇은 가정의 의미를 일찌감치 깨달았다. 가정 생활이 행복한 인생의 기본이란 점을 상기시키는 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터득한 자연스런 결과였다. 반면 데이비드는 7살 때 이혼한 부모로 인해 두 세트의 부모를 갖고 있다는 우스갯 소릴 듣곤 했다. 그런 환경적 요인이 완벽한 가정에 대한 환상과 열망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미래에 대한 격렬하고 개인적인 요구를 갖고 성장했다. 성장 배경은 달라도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리란 삶의 목표가 뚜렷한 그들이었기에 만남부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헤리엇과 데이비드는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근교에 빅토리아풍의 대저택을 장만했다. 부부의 수입을 감안해 볼 때 다소 무리라 생각했지만,  앞으로 행복하고 완벽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집이라 생각하고, 부자인 데이비드 아버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부부는 어떤 일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대부분 별다른 이견 없이 같은 마음이 된다. 어떤 것을 결정하든 기대에 찬 만족스런 눈빛만 서로 교환할 뿐이다. 마치 그들이 꿈꾸는 미래를 방해할 그 무엇도 없다는 듯.


 부부가 그토록 열망하는 미래란 무엇일까?  그것은 짐작한 대로 그들만의 왕국을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히 갖추어진 대저택에서 이제 그들이 소망하던 아이들만 낳고 기르면 된다. 가족과 친척, 친구들이 끊임없이 부부 집을 방문했고,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맞이할 때마다  아이들의 숫자도 늘어갔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처음 계획했던 대로 아이들을 계속 낳았다. 이제 헤리엇은 다섯째 아이를 잉태했다. 이제껏과 다른 느낌으로.


 그랬다. 다섯째 아이는 네 아이들과  달랐다. 뱃속에서부터 헤리엇을 괴롭혔다. 무자비하게 발길질을 해댈 때마다 진정제를 먹으며  태아와 자신을 진정시키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달이 갈수록 고통으로 일그러졌으며, 그에 따른 두려운 예감이 그녀를 초조와 불안에 빠뜨렸다.


 급기야 헤리엇은 뱃속 아이를 원수, 야만적인 것, 갈고리 발톱이 있는 괴물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몸과 정신을 갉아 먹고 있다는 환영과 망상에 시달린다. 이쯤되니 행복한 가정이 무엇으로 인해 풍비박산 나리란 불길한 예감과 함께 스릴러 내지 호러의 으스스한 분위기로 전환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정상적인 가정, 아이를 배고 낳는 과정 속에서 늘 피곤했지만 그래도 행복과 안락함이, 가족의 빈정거림과 지인의 질타가 있었지만, 새 생명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랑과 존경이 로바트 부부의 삶과 함께 했다. 하지만 다섯째 아이를 밴 순간부터 부부의 왕국은 예측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소설의 중후반부를 압도하는 불행과 절망의 스토리는 읽는 사람의 심기를 무척 불편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불행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듯하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그것을 예감할 때가 있다. 헤리엇이 뱃속 태아에게 느꼈던 공포처럼, 마침내 헤리엇이 다섯째 아이를 출산했을 때 보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불행의 징조나 암시를 애써 부정하거나  외면할 따름이다. 물론 개중 예고 없이 닥치는 비극이나 불행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이 발생할 어떤 계기나 요소가 우리의 삶에  암암리에 개입돼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평범하고 정상적인  가정이란 기준이 얼마나 모순적인 것인지, 취약하고 허위적인 껍데기에 불과한지 소설 속 가족의 모습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다섯째 아이 벤으로 인하여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더 이상 지인들과 친척들은 부부의 왕국을 찾지 않는다. 황량하고 쓸쓸한 왕국은 폐허처럼 돼 버린다. 가족은 행복을 되찾기 위해, 남은 가족의 희생을 막기 위해 벤을 요양원으로 보낸다. 부부가 그토록 바라던 튼튼한 모성애를 바탕으로 한 양육은 어찌됐나! 가족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구성원을  옭아매려 하지 않았나!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기보다 비난하고 배척하는 실상은 참으로 참담했다. 그래도 모성애는 인간의 본능이기에 강했다.  그것이 죄책감에서 비롯됐다 하더라도. 헤리엇은 불행의 씨앗을 자신이 거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벤을 요양소에서 데려온다. 그리고 그가 곁에 머무는 동안 그를 지켜준다.


 다섯째 아이 벤은 단란했던 가정을, 아니 운명을 시험했던 부부의 삶을 절망에 빠뜨린다. 그럼 전통적 가치 위에 행복의 왕국을 건설하려던 부부의 꿈과 소망이 잘못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다르고, 인간의 실존적 삶은  근본적으로 위태롭고 불완전한 것이다. 견고한 이데올로기 안에서 완벽한 가정을 추구했던 로버타 부부의 삶을  통해 작가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며, 그래서 그 어떤 것도 확신하거나 자만해선 안됨을 경고하는 것 같았다.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인간 근원의 문제가 심도 있게 그려진 도리스 레싱의 소설은 나에게 깊이 사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