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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r 13. 2018

김승옥의 <무진 기행>

무진으로 가는 버스에서 서술자 ‘나’는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로부터 무진에 대한 평가를 듣는다. 그들에게 무진은 명산물 하나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초라한 고장으로 비춰진다.

‘나’는 생각한다. 무진의 명산물은 안개라고.

그러나  ‘나’가 떠올리는 무진의 안개는 스산하고 음습하며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침에 일어나면 안개는 밤사이 진주해 온 적군처럼 무진을 삥 둘러싸고 모든 물체를 지워버린다. 마치 이승에 한이 있는 여귀가 밤마다 찾아 와 뿜어놓은 입김 같다.'

'안개는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그것은 뚜렷이 존재하고, 먼 곳의 것들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는다.'

만질 수도, 확인할 수도 없는 모호한 정체는 누구에게나 불안과 공포의 대상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안개는 내면의 은밀함을 감춰주고, 지워진 것들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위선과 가면을 벗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도 좋을 것 같은 안도감을 준다. 주인공이 각박한 서울생활에서 힘들고 적적할 때마다 무진을 떠 올리는 것은 그곳이 현실적 공간이 아닌 심리적,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안식처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무진엔 주인공의 암담한 과거가 숨어 있다. 그가 무진을 찾을 때는 늘 서울생활에 지치고 실패를 경험했을 때이다. 그렇다고 그곳이 그에게 희망과 위로와 용기를 준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 그는 골방에 틀어박혀 공상하거나 독한 술과 담배에 젖어 자신을 모멸하고 조소하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그의 어두운 과거는 무진의 안개처럼 그의 내부 곳곳에 스며있다.

그의 어두운 과거란 무엇일까? 그 시대 방황하던 젊은이를 대변하고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대학을 다니고 있을 무렵 6.25 사변이 일어나고, 홀어머니는 아들을 잃을까 두려워 그를  골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주변의 동급생들은 물론 자신보다 어린 학생들이 징병돼 나가는 것을 보며 그는 죄책감과  자기 환멸에 빠져 스스로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있었다.

현재와 과거 사이에서 방황하는 영혼은 인간 내면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현재의 세속적 출세와 성공에 대한 안도감 이면에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에 대한 연민과 애증이 내재돼 있다. 주인공이 겪었던 무진에서의 좌절과 고뇌의 아픔은 60년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흩어버리고 싶지만 사람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안개처럼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하다. 안개처럼 불확실하고 우울한 전후시대의 풍경이 작품 속에 섬세하게 스며들어 시대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었다.  

주인공은 삼십대로 한 번의 결혼 실패 후, 과부였던 지금의 아내와 재혼을 했다. 재력가인 아내의 집 덕에 제약회사 전무자리가 예정돼 있는 그는 잠시의 휴식을 위해 고향인 무진으로 내려오고 그 곳에서 과거의 인물들인 후배 박, 친구였던 세무서장 조, 그리고 젊고 자유분방한 음악선생 하인숙을 만난다.

주인공은 서울에서의 살벌한 경쟁과 긴장으로부터 도피처인 무진에 와서 하인숙과 연애를 하며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무진에 오면 그는 서울에서의 합리성과 이성적인 사고가 아닌 엉뚱하고 공상적인 생각들로 뒤죽박죽되고 어떤 행동이건 거침없이 하게 된다. 이처럼 서울과 무진이라는 공간적 대립과 안개라는 장치를 통해 세속과 탈속, 일상과 일탈, 이상과 현실에 놓인 인간 실존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안개는 현실도피처가 된다. 실체를 모르니 무한히 상상하고 환상에 젖을 수 있다. 안개가 일탈과 부도덕함, 추악함도 덮어줄 것이다. 하지만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비현실의 세계에서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이 인간사이다. 무진에서 보내는 현실도피적인 시간은 짧기 때문에 그 만큼 더 아쉽고 아름다워 그의 감성을 자극한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서 원초적 본성이 저지른 행동이 걷히면서 그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도 커진다. 그는 무진을 떠나면서 하인숙을 서울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란 사실에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무진기행」은 짧은 단편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작가 김승옥의 아름다운 문체와 필력이 잘 드러나는 소설이기도 하다. 다소 긴 문장표현은 그 만큼 자세하면서 섬세하다. 비유와 상징성이 풍부한 만큼 함축된 의미도 깊다. 안개라는 소재는 많은 것들을 시사하고 있는 듯 했다. 무진이라는 가상의 공간 속에 안개, 바다, 자살과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인간의 삶 자체가 불완전하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생의 깊은 철학과 성찰을 준다. 또한 무진의 안개가 짙은 만큼 태양과 같은 희망이 더욱 절실함을 역설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무진에서 오래 머물 수 없는 주인공처럼 우리 삶  또한 유한하고 불안정하기에  지금 딛고 서 있는 현실적 삶이 그 만큼 더 소중하고 가치 있으며, 그래서 한 순간도 헛됨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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