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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Apr 01. 2018

카프카의 (변신)

 

'변신'을 읽으면서 주인공은 왜 하필 갑충 벌레로 변했을까?  차라리 나비나 새로 변했음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 텐데, 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둔해진 몸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부분이 답답하고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정신까지 완전히 탈바꿈 하지도 못하는 존재의 비참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느 책에서 읽은 것을 기억해 볼 때 다른 것으로 변한 자아(타자)는 외부적 존재로 전환된 ‘나’다. 타자의 출현은 자아의 부정적 현시이다. 내가 다른 것 되기를 열망한 잠재의식의 소산이라 볼 수 있다.


작가 카프카는 주로 소외와 불안, 내재된 욕망 등을 타자의 징후로 포착하여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한다 ‘변신’은 한 마디로 인간의 동물되기가 모티브이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리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한 마리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갑옷처럼 딱딱한 등을 밑으로 하고 위를 쳐다보며 누워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란 사실 많은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인 침전물이 돌연 수면 위에 떠오른 결과일 뿐이다. 내면에 잠재된 불안과 결핍, 욕망이란 것이 내부의 힘의 구조를 재구축함으로써 주체는 다른 존재의 문턱을 넘어선다. 마치 한계에 이른 물질이 다른 형질로 전환돼버린 것처럼.


「변신」은 회사라는 조직의 관성에 따라 움직이던 외판원 그레고르가 가족이란 역학관계 내에서 종속되었던 타율적 존재를 벗어나 자율적 존재로 바뀜으로서 또 다른 자아를 획득함을 의미한다. 


자신을 규정하고 있던 모든 환경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존재로 탄생되길 바라는 욕망의 발현이다. 사실 가족 내 존재하는 권력의 횡포는 표면적으로 사랑과 의무, 책임이라는 도덕, 윤리적 잣대를 내세우며 독립적 개인의 삶을 억압한다.


그레고르는 빚을 진 아버지를 대신해 채무를 갚고, 여동생을 공부시키고,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역할까지 떠맡았다. 결국 그의 삶을 담보로 가족은 안락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흉측한 갑충으로 변한 그레고르는 가정의 일상적 질서를 깨고 이질적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가족에게 배척당하고, 학대받는 대상이 되어 결국 죽음에 이른다.


그의 고통은 신체적 변화가 원인이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가 가족 내 권력의 질서에서 무단 이탈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는 이제 회사에 나가 돈도 벌어올 수 없고, 심지어 가족에게 영원히 얹혀 살아야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됐다.


가족들은 처음엔 그가 전락한 것에 대한 연민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가정을 파괴하는 불행의 근원으로 각인된다. 가족들은 그를 위협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


가족은 그레고르 때문에 당황하고 겁먹고, 불안감에 떨고, 분노하고 슬프고 불행하다. 급기야 누이는 그를 ‘짐승’이라 부르며 저것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족들을 선동한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을 누이가 총대를 멘 것이다. 마침내 가족은 그가 없어야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결국 부모와 누이가 공모해 그레고르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카프카는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문학의 화두로 삼은 것이 유난히 많다. 그는 체코 프라하에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비교적 풍족한 환경에서 독일계 학교를 다니며 고등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완전한 독일인도 체코인도 또는 유대인도 되지 못한 그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로 인해 주체적 삶을 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연인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삶은 영원히 안주할 수 없는 타자로서, 그레고르의 삶처럼 불안한 것이었다.


결국 신경쇠약증에 시달리고, 결핵을 앓다가 그의 다른 작품 「성」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의 궤적을 볼 때 정체성 부재와 인간소외, 삶의 부조리 등이 왜 그의 작품 저변을 관통하는 핵심적 주제가 될 수밖에 없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벌레 변신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했지만, 그 모습 또한 차별과 편견, 소외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처럼 ‘나’란 존재는 타자의 ‘타자’일 수밖에 없는, 즉 자아란 수많은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예전에 가족에게 그레고르는 사랑하는 아들, 오빠였지만, 지금은 벌레, 짐승, 쓸모없는 존재로 규정된다. 결국 자아란 누군가에 의해 인지되거나, 불러지거나, 인정받을 때만 존재하게 된다. 그럼 수많은 자아 중 도대체 나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카프카의 작품 속 정체성의 혼란은 그렇게 영원히 지속되는 듯하다.


주인공의 변신은 외부에 의한 것이 아닌 주체의 내적 욕망과 갈망의 무의식적 발현이라 여겨진다. 그는 벌레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그것은 진정 자신이 원한 삶이 아니었을 자각한다. 그레고르는 가족의 부양을 위해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고, 그래서 무의식의 욕망은 주체적 삶을 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변신을 택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비정한 가족과 더 나아가 사회는 주체적 인간의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 권력 또는 기계화된  강력한 집단의 틀 속에 개인은 한낱 벌레처럼 미미하고 무력한 존재로 취급된다. 이처럼 「변신」은 물질과 권력에 노예가 된 현대사회의  인간 모습을 비판하고 있으며, 파괴된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회복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진정한 자아 찾기를 바라는 작가의 생각이 잘 반영돼 있다.


이 작품은 관점에 따라 여러 층위로 의미가 확장되는 것 같다.  크게는 물질의 우위적 가치 속에 상대적으로 소외된 인간존재의 극성을 통찰하고, 개인과 사회의 충돌로 빚어진 갈등은 정체성의 문제로 형상화하며, 궁극적으로 인간실존의 부조리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한편으론 가족의 의미를 재인식하고 곱씹어 보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할 것 같은 운명 공동체인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횡포와 폭력의 실체를 ‘변신’ 속 인물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현재도 가족 내 폭력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지만,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폭력뿐만 아니라 감춰진 폭력이 많다는 점이다. 너무도 일상적인 모습이어서 그것이 폭력인지 아닌지 구분을 할 수 없다. 지나친 관심과 끊임없는 기대, 바람은 사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횡포와 억압이 될 수 있으며 무의식적 갈등과 분노를 조장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 감정이 쌓이다 보면 누구든  ‘변신’ 속 그레고르가 될 수 있다. 아니 이미 우리 내면엔 무엇으로 변할지 모르는 수많은 타자가 숨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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