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택시가 왔다. 택시가 유난히도 잡히지 않는 동네인데 이 날따라 택시가 성큼 와버렸다. 마지막 짐 점검을 마치지 못한 채 부랴부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런데 아뿔싸. 1층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놔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휴대폰을 찾고는 싱크대를 보니 배수구에 음식물 찌꺼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벌레 무덤이 될 뻔한 음식물을 음식물 처리기에 넣고 집을 나오려는 순간, 아이 젖병을 챙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누워서 우유를 먹는 것을 하루의 첫 행복이라 생각하는 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인데 마지막 순간에 알아채서 다행이다. 젖병 두 개를 백팩에 욱여넣고 아이를 안고 그대로 내달렸다. 다행히 택시기사님은 이해한다는 듯 짜증을 내지 않으셨고 무사히 강릉행 기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항상 여행의 시작은 허둥지둥이다. 역시나 기차가 달리는 내내 아이는 잠을 자지 않았고 지겨워했지만 첫 KTX 포항 여행에 비해 기차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강릉역에서 나와서 책방에 잠시 들렀다가 지인과 가볍게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게스트하우스에서의 밤은 걱정과 달리 순조로웠다. 공유공간이 넓은 숙소가 신기한 모양이었던지 아이는 끊임없이 돌아다녔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키우는 고양이 두 마리는 덤!
@ 강릉 고래책방, 리그넘 파인트
2일차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오래전부터 먹고 싶었던 물회를 먹고 별 일정 없이 소소하게 보낸 여행 이틀 차. 언덕에 위치한 아담한 강릉시립미술관에 들러 작은 전시회를 보고 강릉시내를 내려다본다. 강릉의 낮은 집들이, 그리고 이 시간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야식으로 포장해온 회를 먹으면서 목동에 산다는 흥미로운 커플의 흥미로운 목동이야기를 들으면서 밤은 깊어간다.
@ 주문진 대길횟집, 강릉시립미술관
3일차
의도치 않았지만 나름 강릉의 핫플레이스로 채웠던 하루. 여행의 시작은 화려한 미디어아트로 가득 찬 아르떼뮤지엄이었다. 사람이 많을 것이라 예상하고 일찍 서둘렀는데 사람들은 많았지만 전시를 보는 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변화무쌍한 미디어아트가 흥미롭다기보다는 어딘가 부산스럽다. 그런데 하마터면 놓칠뻔한 명화 전시관에서 본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마음에 오랜 여운을 남긴다. 빛의 향연이 미디어아트를 만나 명암이 극대화된 공간 안에 마치 나 혼자 서 있는 듯했다. 물론 전시를 보다가 유모차에서 잠이 든 아들의 협조도 한몫을 했다.
점심으로는 강릉의 오랜 맛집이었다는 식당에서 생선구이와 꽁치전을 맛있게 먹고 오늘에서야 게스트하우스 바로 앞에 있는 순긋해변에 몸을 적셨다. 아이는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를 두려워했고 강릉에서의 첫 바다는 나의 상상과는 달리 아이의 울음소리, 뜨거운 날씨, 거센 파도로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 또한 여행의 묘미려니 생각하며 저녁에는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강릉의 명물 브루어리를 다녀왔다. 분위기, 맥주맛, 음식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아니한 것이 없어서 남편과 나는 이번 여행 중 다시 한번 오리라 생각했다. (다시 오자는 말을 입밖에 낸 적은 없지만 결국 서로 그런 마음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 아르떼뮤지엄 강릉, 삼미식당, 순긋해변, 버드나무 브루어리
4일차
3일간의 강릉여행을 마무리 짓고 고성으로 넘어가는 길. 강릉 외곽에 있는 동물농장에 왔는데 아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특히, 양이 울기만 하면 밖으로 나가자고 아우성이어서 공짜로 받은 동물 먹이를 반도 못주고는 농장을 나왔다. 고성으로 가는 길에 속초에 들러 부랴부랴 검색해서 찾은 물회 집을 찾았다.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큼 맛있는 물회를 먹고 고성 초입에 있는 아야진 해수욕장을 들렀다. 사람들이 기분 좋게 붐비고, 지역민들이 애정을 가지고 꼼꼼히 관리하는 흔적이 인상적이었던 해수욕장이었지만 여전히 아들은 바다를 무서워한다.
파도가 닿을 듯 말 듯 한 모래사장에서 모래놀이를 하다 에어비앤비로 잡은 숙소에 도착했다. 에어비앤비 숙소가 많지 않은 고성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급하게 잡다 보니 고성의 북쪽 끝자락 거진해변에 오게 되었다. 저녁이 되니 무거운 침묵이 내리는 숙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몇 군데 없는 식당 중 하나를 찾아 밥을 먹었다. 여름휴가 최성수기가 무색할 만큼 고성 끝자락은 그렇게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 대관령 아기동물농장, 속초 영금물회, 아야진해수욕장
5일차
오늘은 마음먹고 본격적인 해수욕을 해볼 참으로 여행 와서 처음으로 고무튜브에 바람을 넣고 송지호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해수욕장은 투명하게 맑고 사람들은 의외로 적은 편이었다. 날씨는 쾌청하고 뜨거워 해수욕을 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였지만 역시나 아들은 바다를 두려워한다. 아직 두 돌도 안된 아기에게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얼마나 무섭겠는가. 이제는 우리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여행가방 큰 부분을 희생해가며 가져온 튜브를 한 번도 못쓰고 가기엔 아쉬워 아들을 살살 꼬드겨 아들을 태웠는데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한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좌판에서 빌린 파라솔을 가져와 설치하고, 돗자리를 깐 우리의 노력이 무상하게 30분이 채 지나기 전에 물놀이가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지친 마음을 달래며 일단 숙소로 퇴각. 전열을 정비하고 나서는 남편이 발견한 숙소 근처의 활어난전에서 회를 뜨다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활어회가, 그중에서도 도다리가 일품이었다! 그렇게 성찬을 먹고 늘어지게 자다가 저녁이 되었다. 강릉 버드나무 브루어리가 우리 부부의 사그라들었던 열정을 다시 불태웠는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해가 지자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차로 달려 맥주집을 찾았다. 아이도 초저녁 호프집의 들뜬 분위기에 함께 휩쓸린 것인지, 해변가에서 터지는 작은 폭죽이 신기한지 연신 기분이 좋았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또 하루가 저물어 간다. (사실 나는 맥주를 거의 못 마시므로 분위기만 즐기고 안전한 귀갓길을 책임진다)
@ 송지호 해수욕장, 거진항활어난전, 미픽펍 by 문베어 브루잉
6일차
마음과 몸이 바쁜 하루였다. 고성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 더 가열차게 놀아야 한다는 압박이었을까. 고성에서 잠깐이라도 들러보고 싶었던 곳들을 점찍듯 돌아다녔던 날이었다. 첫 일정인 화진포 해수욕장은 숙소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선택된 목적지였다. 그런데 화창한 날씨에 화진포 해수욕장의 물은 유리처럼 맑았다. 하루 종일 하염없이 이 바다만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들을 안고 화진포 해수욕장 주변 언덕을 오르내리며 간절한 생각을 해 보았다.
맑은 물결에 감동 반 아쉬움 반을 안고 동치미 막국수를 점심으로 맛있게 먹고는 이스트사이드바이브클럽이라는 이름도 거창한 카페에 갔다. 고성 산불에 불탄 건물을 그대로 활용하여 중미 어느 섬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의 이국적인 카페였다. 세상에는 과감한 생각과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용감무쌍한 사람들이 마음껏 활보한 흔적들을 조심스레 들춰보며 느꼈던 신선하고 시원한 감동을 천천히 오래 간직하고 싶다.
시간이 어중간히 남아 호텔 키즈카페에서 모처럼 편안한 시간을 보내다가 우리의 고성 마지막 브루어리인 몽트비어로 향했다. 키즈카페에서 신나게 논 아들은 몽트비어에서 남편이 3잔의 맥주와 피자 두쪽을 (허겁지겁) 먹을 때까지 유모차에서 잠을 잤다. 나도 무알콜 맥주와 피자를 먹으며 모처럼의 조용한 여유를 즐겼다. 남편은 숙소로 돌아와 어제 활어난전에서 사 온 도다리를 잊지 못하고 다시 난전으로 나가 쥐치를 사 왔다. 고성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 이스트사이드바이브클럽, 켄싱턴리조트 설악비치 코코몽 키즈룸, 몽트비어
7일차
이제 고성에서 강릉으로 내려가는 길. 나는 왜 평소 잘 타지도 않는 관람차를 타고 싶었을까. 아마도 더운 여름날 아이를 안고 해변을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벅차지만 푸른 바다는 보고 싶은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놀라운 기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매표원의 성의 없는 말과는 달리 30분 남짓 기다려 관람차를 탈 수 있었다. 관람차 안은 쾌적했고, 푸른 속초 바다를 볼 수 있었으며, 아이도 낯선 체험을 좋아했다. 그렇게 15분간의 짧고도 긴 관람차 여행을 마치고 내려와 보니 그 사이 줄이 더 많이 늘어있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남편이 미리 봐 두었던 양양의 시골 어느 마을에 위치한 한우 등심집에서 점심을 먹고 무사히 강릉으로 내려왔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영진해변 근처 작은 오피스텔에 짐을 풀었다. 걸어서 5분 거리의 해질녘 영진해변은 얕고 따뜻했다. 여행의 마지막이라는 아쉬움보다는 일주일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이 더 컸던 우리는 한가로이 해변을 거닐었다. 그리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이번 강릉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버드나무 브루어리를 다시 가보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이었던 만큼 사람들이 많았지만 20분 정도 대기 끝에 테이블에 앉았다. 아이는 그간 여행이 힘들었는지 브루어리로 오는 차 안에서 내내 자더니 유모차에 옮겨져서도 단잠을 잤다. 남편은 급하게, 그러나 아주 즐겁게 맥주 세 잔을 연거푸 마셨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어디였냐며 진부한 대화를 나누면서 피자를 맛있게 먹고, 그 사이 깬 아들 저녁을 먹이고는 강릉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마무리하였다. 숙소로 돌아와 아들과 나는 단잠에 빠졌는데 남편은 마지막 밤이 아쉬웠는지, 해변이 가까이 있어서였는지 저녁 해변 산책을 했다고 했다.
@속초아이 대관람차, 양양 산촌생등심, 강릉 영진해변, 버드나무브루어리
마지막날
초당순두부를 먹겠다는 여행 전 결심과는 달리 여행기간 중 두부요리를 한 번도 먹지 못했다. 강릉을 떠나기 전, 초당순두부를 먹겠다고 호기롭게 나섰는데 한 시간 대기이다. 그간 한산한 곳만 찾아다녔는지 이제야 우리가 최성수기에 여행을 왔구나 실감을 한다. 계획을 수정하여 지인에게 추천받은 황태뚝배기집에서 만족스러운 점심을 먹고 강릉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별 것 없는 강릉역에서 아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뛰어다니며 춤을 춘다. 갑자기 이 작은 아이에게 여행이란 것이 크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감이 들긴 했지만 강릉에 왔다는 사실. 두 돌 안된 아이를 안고 일주일 간의 강릉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만감을 느꼈으니 됐다. 결국 여행도 자기만족이므로. 하지만 아들이 연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궁색한 자기합리화같다는 슬픈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기차 안에서 아이는 오래 잠을 잤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더운 열기에 심신이 빠르게 녹아드는 것 같았지만 괜찮다. 우리에게는 강릉에서의 잔잔하지만 싱그럽고 푸른 기억이 남았다.
@산촌식당 황태뚝배기, 강릉역
덧. 이번 여행에서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면..
아이 세제를 챙겨가지 않았던 것. 에어비앤비 숙소를 자주 이용하는 우리 부부였지만 숙소에서 빨래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데려가니 자주 빨래를 할 수밖에 없었고, 간단한 빨래는 손빨래로, 큰 빨래는 세탁기로 해결했다. 하지만 세제가 없는 곳도 있었고, 아무래도 아이 빨래다 보니 아이 세제를 소량 가져왔다면 좋았을 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일주일 여행을 한다면 2-3회 빨래할 수 있는 소량이면 충분!
조금 더 가벼운 유모차를 구비하지 못한 것. 유모차를 가져갈지 말지 고민이 많았었고, 결국 유모차를 가져갔다. 결과적으로 아이와 편하게 이동하려면 유모차는 필수였고,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절충형 유모차였음에도 무거웠고, 지역에 따라 유모차 대여가 가능하니 사전에 휴대용 유모차를 잠시 빌려도 좋고, 여행지에 가서 유모차를 대여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