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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Jan 19. 2023

다시 찾은 제주

1일차     

겨울 제주는 처음이다. 작년 10월 이후 올해 처음으로 아이와 함께 다시 제주를 찾았다. 남편의 외가를 방문하여 외할머니께 새해 인사를 드린다는 좋은 명분을 가진 여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명분이 무색할 만큼 제주는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남편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 목요일 저녁 비행기를 탔고, 늦은 밤 제주에 도착했다. 그 짧은 비행시간 동안 아들은 밥과 구운 돼지고기뿐인 부실한 도시락을 누구보다 재빨리 먹어치웠다. 다행히 배가 불러 기분이 좋은 아들과 함께 힘들지 않은 비행을 마치고, 여행 기간 동안 신세를 질 지인네 집으로 갔다. 이름도 생소한 제주의 특산물 긴꼬리뱅에돔이 식탁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러모로 과분한 환영이었다.    

 

2일차     

특별히 여행 일정을 짜지는 않았다. 하지만 겨울 제주가 처음인 만큼 개인적인 욕심이 있었다. 제주의 동백꽃을 보고 싶었고, 오름을 하나 오르고 싶었다. 그리고 한적한 미술관을 가보고 싶기도 했다. 여러모로 여유로웠던 여행 2일차, 동백을 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서귀포에 있는 동백수목원으로 향했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 앉아 아이를 안고 무심히 친한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친구도 제주도에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동백수목원과 5분 거리 숙소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는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다. 우연히 찾은 바비큐 식당은 충분히 맛있었고, 자주 보는 친구였지만 제주에서 우연히 만나니 더 반가웠다. 점심을 먹고 오후 일정이 없다고 하는 친구를 데리고 동백수목원으로 갔다. 평일이었지만 주차장은 이미 만차 수준이었고, 사람들은 붐비었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번잡한 관광지였지만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들에 흐드러지게 핀 붉은 동백은 장관이었다. 아이도 비현실적인 장면에 동화되었는지 동백나무 사이사이를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렇게 천천히 동백수목원을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짧은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친구를 숙소에 데려다주고는 치킨을 사들고 지인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의 추천으로 사 온 치킨은 훌륭한 저녁식사였다.     

@제주 동백수목원, 마므레 바비큐, 시청치킨     


3일차     

토요일이자 2022년의 마지막날. 이날 오후 3시 즈음 외할머니댁으로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지인 가족과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근처 놀이터로 가볍게 산책을 갔다. 차로 15분 정도 달렸을 뿐인데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바닷가 바로 옆에 작은 놀이터가 있었다. 세찬 바람이 연신 불어오는데도 아들은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미끄럼틀을 무한대로 반복해 탄다. 행복해 보인다. 그저 바다만 바라보고 있어도 제주가 벌써 그리워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어영부영 이른 오후 일정을 마치고 외할머니댁으로 왔다. 작은 1층집이 정갈하고 소담스럽다. 할머니가 차려주신 정갈한 제주갈치 구이와 반찬들을 맛있게 먹었다. 제주에 와서 이틀밤을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었던 아들은 저녁을 먹고 나자 잠이 오는지 생떼를 부리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올해 마지막날이라는 것도 잊은 채 우리도 일찍 잠이 들었다.     


4일차     

2023년 1월 1일이다. 할머니와 함께 일찍 채비를 하고, 남편의 큰외삼촌집으로 갔다. 큰 외삼촌네와 작은 외삼촌네, 그리고 사촌들까지 제법 북적북적한 신년 아침이다. 차례를 지내고 큰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신정을 이렇게 명절 분위기에서 보내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그 많은 음식들을 하기 위해 며칠을 고생했을 숙모들을 보며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릴 적 북적거리던 명절 분위기가 생각나 모처럼 기분 좋은 새해를 보냈다. 가족 모든 구성원들이 집안일을 서로 돕는 분위기가 된다면 가끔은 이런 가족모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할머니도 기분이 좋으셨는지 느긋하게 밥을 드시고는 점심 즈음 할머니집으로 돌아왔다. 


모처럼 할머니 이야기도 듣고 시간을 보내다가 이른 저녁 시간 지인네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애월에 있는 텍사스 바비큐집을 예약해 놓았단다. 지인네 가족과는 몇 년 전 함께 텍사스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커다란 헛간 같은 공간에 세심하게 꾸며진 바비큐집에서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며 밥을 먹고 있자니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하면서도 텍사스에 없던 바다가 생생하게 펼쳐지니 어딘가 묘한 기분이었다. 여러모로 우리 여행에 조용히, 하지만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지인네의 배려가 참 고맙다.  

@후프바베큐     


5일차     

월요일이다. 박물관, 미술관이 열지 않는 월요일은 항상 빈곤한 기분이다. 안개가 자욱이 낀 날씨 때문인지 오름에 올라가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밤 검색해 둔 물영아리 오름이 여러모로 제격일 듯하여 지인네 언니와 8살 난 둘째 딸, 그리고 우리 가족 5명이 낮은 오름을 올랐다. 오름 초입에 어린아이와 함께 온 탐방객과 만나게 되었는데 오름길에 눈이 쌓여있어 포기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알려주었다. 멀리 보이는 오름길은 보기에도 눈이 꽤 많이 쌓여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몇 걸음이라도 걸어볼까 하여 조심조심 눈 쌓인 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의외로 그 짧은 구간을 지나니 나머지 길은 두 돌 된 아이가 걷기에도 무리가 없는 길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걸으니 오름길 중간에 있는 전망대가 나타났다. 전망대에 앉아 찬 바람을 맞으면서 아이들은 과자를 먹었다. 겨울바람에 꽁꽁 언 손으로 빨개진 볼 안으로 과자를 연신 넣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 귀여웠다. 전망대 위로 나있는 길은 눈으로 덮여 있어 전망대 구경만 하고 왔던 길로 되돌아왔다. 곧게 뻗은 겨울나무 사이로 햇빛이 일렁이던 오름길은 참으로 예뻤다. 다만, 오르막길을 잘 걸어가던 아들이 다리가 아픈지 내려가는 길에서는 걷지 않겠다고 했다. 아빠한테도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통에 무거운 아들을 혼자 들쳐 안고 내려왔다. 그다음 날부터 허리 통증이 시작되어 결국 서울로 돌아와 정형외과를 전전했지만 이 날 오름을 오른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점심은 가볍게 국수를 먹고 돌아가려는데 아들이 응가를 했다. 다행히 근처 지인이 평소 가보고 싶었던 카페가 있다고 하여 카페에 잠시 들러 참사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똥 치울 목적으로 방문하기에는 여러모로 아까운 카페였다.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나에게 반가운 디카페인 커피가 준비되어 있었고, 디카페인 커피로 만든 바닐라라떼는 너무 달지 않고 맛있었다. 적절한 타이밍에 응가를 해준 아들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물영아리 오름, 해비치쉽터(해비치국수), 노바운더리 카페     

 

6일차

다음날 아침 일찍 제주를 떠날 예정이라 사실상 오늘이 제주에서 보낼 수 있는 마지막날이었다. 가고 싶었던 김창열미술관과 바로 옆에 있는 제주현대미술관을 다녀왔다. 김창열 선생님의 물방울 그림은 실제로 보니 더 신비스럽고 아름다웠다. 어두운 조명 때문인지 무섭다며 전시관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아들을 데리고 여유 있게 구경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림 여기저기 맺혀 있던 물방울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제주현대미술관은 크지는 않았지만 제주와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현대미술관 부속건물이자 미디어아트를 볼 수 있는 공공수장고에서는 김보희 작가와 음악가 하림이 함께 만든 미디어아트가 상영 중이었는데 하림의 조용한 음악과 함께 하니 신비로운 김보희 작가님의 그림들이 더욱 빛났다. 미디어아트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들도 10여 분간 조용히 내 옆에 머물러 주었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뭉클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김창열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공공수장고)     


7일차     

제주의 마지막날은 항상 아쉽다. 이번 여행에서는 지인네 둘째 딸이 우리 아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본인 장난감을 빼앗듯 가져가놓고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 작은 괴물을 아무도 따끔하게 혼내지 않는 부조리한 상황이 계속되자 마음에 서러움이 쌓였다. 예전에는 우리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던 예쁜 아이가 오늘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고생 많았어 솔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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