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수술을 받은 지 일주일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 아빠도 외래를 다녀오고, 엄마의 기력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7월 20일 새벽 6시도 되지 않았는데 아빠의 문자가 와 있다 "일어났나요?" 순간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침 8시 전에는 혹시나 우리가 깰까 봐 연락을 하지 않는 아빠가 새벽 6시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애써 태연한 듯 다급한 문자를 보냈다는 것은 비상상황이었다. 아빠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나에게 연락을 하기 전, 그 며칠 사이 아빠는 혼자 마음을 졸이며, 외롭고 막막했을까. 엄마가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황달 수치가 급속도로 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담도 배액술은 하지 못했고, 스탠트 시술이라도 하여 담즙을 빼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식을 해야 하는데 기력이 없었던 엄마는 금식 후 더욱 기력이 쇠했다. 그 금식을 스탠트 시술 때문에 계속 이어가야 했고, 7월 25일 스탠트 시술이 성공적으로 되었지만 오히려 황달수치는 스탠트 시술 후 더 높아졌다. 그때 이미 황달 수치가 15mg/dl이었다. 정상 기준치는 1mg/dl이니 이미 심각하고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는 오도 가도 못하고 그저 전화기만 붙들고 있는 며칠을 보냈다. 조치원에 살고 있는 동생이 먼저 창원으로 긴급 투입되었다. 엄마의 상태를 지켜본 동생은 나에게 지체 없이 비행기표를 끊어서 창원으로 오라고 했다. 단호한 결정을 내려준 동생에게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엄마와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을 테니까. 7월 25일 동생의 전화를 받고 7월 26일 밤비행기를 탔다. 회사에 내일 한국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엄마와의 이별은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는 강하니까.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양곤에서 인천까지 6시간.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철도로 서율역으로 이동한 다음 서울역에서 창원으로 가는 KTX를 탔다. 창원역에 도착하니 아빠차로 동생이 마중을 나와있었다. 살이 탈 것만 같은 그 더위 속에서도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늘은 맑고, 오랜만에 반가운 동생 얼굴을 보았는데 동생과 나의 눈동자에는 깊고 깊은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를 만났다.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엄마. 하지만 이미 엄마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삶에 대한 의지도, 나에 대한 반가움도 없었다. 오직 눕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이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왜 왔냐고 짜증이라도 낼 줄 알았는데 그저 먼 곳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목놓아 울 수는 없었다. 엄마의 손을 잡았다. 한 번도 내 손보다 차가웠던 적이 없었던 그 손이 얼음장처럼 차다. 손과 발, 얼굴, 심지어는 두피까지 노랗게 물든 우리 엄마. 그래도 희망의 끈은 어찌나 질긴지. 병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엄마의 모습을 보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아빠와 나, 동생은 엄마가 이 시련을 딛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혹시나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수박 주스, 조갯국, 전복 달인 물 등을 가져갔지만 건더기가 없는 주스조차 삼키기 어려워했다. 내가 한국에 온 지 삼일째 되는 날이었을까? 엄마의 상태가 약간 호전되었다. 드디어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니는 여기 왜 왔노" 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들을 줄 알았던 그 꾸지람 같은 얘기를 3일이 흘러서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울컥했지만 그래도 기뻤다. 이제 엄마가 우리에게 돌아오려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날 저녁, 엄마는 연두부, 수박 주스, 조갯국을 먹었다. 기분이 좋아진 동생과 아빠 그리고 나는 들뜬 마음으로 밤중에 마트에 들었다. 내일은 엄마에게 무엇을 먹이면 좋을까 하고. 하지만 그다음 날 아침, 엄마의 황달 수치는 더 나빠져 있었고, 수치가 나빠진 만큼 상태도 나빠져 갔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간호사 말에 휠체어를 태워 밖으로 나왔지만 엄마는 자꾸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다. 몇 번을 불어도 일어나지 않던 엄마, 휠체어를 조금이라도 세게 밀면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던 엄마.
엄마가 그렇게 이승에서 저승으로 서서히 건너가고 있던 어느 날 밤, 보름달이 떴다. 아빠와 나는 엄마 휠체어를 끌고 병원 옥상 정원으로 갔다. 한여름이었지만 한낮의 더위가 가신 여름밤이었다. 엄마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력을 뱉어내듯 ”이해가 안 간다, 이해가 “라는 말을 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아빠의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도 이해가 안 가는데 이해가 안 가는 건 당연하지 “라고 차분히 대답하는 아빠의 마음이 어떨지 가히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이제 해줄 것이 없다고 했다.
병원의 밤은 간병인이 지켰다. 그날 밤 간병인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엄마가 몸에 달려있는 모든 줄들을 뜯어내고, 갑자기 혼자 일어서서 화장실을 가려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황달 수치는 이제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엄마의 몸속에 모르핀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혼자 병원 삼촌집에 잠시 있게 되었는데 이제 엄마가 모르핀을 맞기 시작했다는 문자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오열했다.
내 몸 어디서 그런 서러운 소리가 자리 잡고 있었는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소리가 나왔다.. 입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는 소리. 짐승 같은 소리로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하지만 세상은 잔인하게도 맘 편히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와 함께 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은 지금 오열하는데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쓸 수 없었다.
우리는 이제 너무나 자연스레 어떻게 하면 편하게 엄마를 보내줄까 하는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가고 싶다는 얘기를 띄엄띄엄하는 엄마의 소원대로 고향집으로 갈까. 호스피스로 갈까 아니면 이 병원에 계속 남아있을까.
암환자 카페에서 가끔 호스피스 병동으로 언제쯤 옮기는 것이 좋을지 자문을 구하는 글들이 올라오곤 했다. 그 글들을 읽으면서 저 가족들의 심정은 어떨지 상상하곤 했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의 공허한 마음을.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그냥 다인실 병원에서 보낼 수 없어 그 공허함 속에서 없는 길을 찾아 헤매는 기분을 말이다.
그나마도 기존 병원은 1인실 자리가 없어 옮기지 못하고, 우리 고향집은 더위와 모기 때문에 임종을 앞둔 환자가 지내기에는 적합하지가 않았다. 일단 호스피스 병동이 있는 병원을 직접 방문하기로 했다. 각자 역할에 따라 내가 근처 파티마 병원을 찾았다. 이럴 때 내가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병원에 도착했다. 파티마 병원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숨어있는 호스피스 병동은 생각보다 매우 작았다. 어렵게 찾아간 병동에는 잔잔한 노래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엄마 나이, 병명 등을 차근차근하게 물어보는 간호사의 말에 또 마음이 울컥해서 였을까? 멈추지 않는 눈물을 쏟으며 등록절차를 마치고, 입원이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제는 받아줄 호스피스 병실이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내 처지가 참 처량했다.
호스피스 병원에서 엄마가 있는 병원에서 돌아오자 엄마 담당 교수와의 면담이 잡혀 있었다. 그날 아침 우리 가족이 담당 교수와의 면담을 요청한 상태였다. 엄마는 정말 이제 가망이 없는 건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등을 문의하기 위함이었다. 아빠는 교수님을 믿고 희망에 부풀어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여기가 마지막이 될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말을 차분한 말투로 차근차근 얘기했다. 아빠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나는 옆에서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교수도 무슨 말을 하랴. 말을 아끼던 교수는 저로서도 유감입니다 라는 한마디를 하고 면담은 끝났다. 결국 이제는 가망이 없다는 말과 함께.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면담을 마치고 돌아와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길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엄마의 몸에서 균이 검출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항생제를 오래 써서 장에서 검출되는 균이라고 한다. 균 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전염성이 있다 보니 다른 병원으로의 전원이 힘들어졌다. 대신 오래 기다려야 했던 1인실을 급히 배정받았다. 구름 한 점 없던 밝고 뜨거운 여름날, 2주간의 병원 생활 동안 이곳저곳에서 옮겨다 놓은 세간살이를 정리했다. 물티슈, 기저귀, 방수패드, 숟가락, 소형 선풍기, 컵. 참 허망했다.
그렇게 옮긴 1인실은 밝고 넓었다. 우리는 엄마의 연명치료를 거부했다. 승압제도 쓰지 않겠다고 서명했다. 산소포화도가 조금씩 떨어지다가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엄마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보호자 1인 외 출입금지를 외치던 간호사들이 이제 어머니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니 인사해야 하는 가족, 친지들이 있으면 연락을 하라고 했다. 엄마는 그 사이 구강호흡을 하기 시작했고, 몰라보게 수척해 있었다. 우선 동생네와 조카가 왔다. 5개월 된 조카. 내가 그렇게 엄마 이름을 부를 때 한 번도 내 목소리를 듣고 크게 반응을 하지 않던 엄마가 조카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조카 손을 잡으려고 손을 들었다. 사랑, 못다 준 사랑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외할머니,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외삼촌과는 매일같이 연락하던 터라 상황의 심각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외삼촌과 같이 살고 있는 외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다. 딸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 자체도. 하지만 무언가 큰 병에 걸렸구나 짐작은 하고 계셨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셨을 터다. 할머니가 오열했다. "니가 어떻게 나보다 먼저 간단 말이고. 갈 바에야 고통 없이 편히 가라. 어서 가라"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삼촌이 천천히 다가왔다. 삼촌은 다리가 불편하여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휠체어를 타고 천천히 다가오는 삼촌의 모습은 이미 눈물에 푹 젖어있었다. 한참을 침묵 속에 있던 삼촌이 "누나야" 예순이 훌쩍 넘은 삼촌이 누이를 찾는 그 말이 왜 유난히 가슴을 찔렀던 걸까. 삼촌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었던 누이. 각별했던 남매. 나는 본 적 없지만 항상 손을 꼭 잡고 다녔던 어린 남매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슬픈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의 이 슬픈 마음을 나눌 이가 동생과 아빠 외에도 세상에 두 사람 더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잔인한 생각이지만 외롭지 않았다.
그날 밤 밤늦도록 가까운 친척들이 오고 갔다. 아빠가 병실을 지키고, 동생과 나는 병원에서 가까운 막내 삼촌네집에서 묵기로 했다. 친척들을 보내고 삼촌네 집으로 돌아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아빠였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 엄마의 마지막이었다. 잠들 듯 편히 갔다고 하는 아빠의 말이 진실이기를. 진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엄마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지만 그건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이제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믿을 수 없이 슬펐기 때문이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 8월 1일, 우리는 엄마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