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 동생은 돌보아야 할 5개월짜리 아들이 있고 나는 외국에서 근무 중. 세 사람 중 어느 한 사람도 엄마를 전적으로 맡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수술 후 2주 정도면 퇴원을 생각했던 터라 망설임 없이 간병인을 두고 아빠가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엄마의 안부를 살폈다.
1차 수술 직후 연결된 간병인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옆에서 지켜보다 못한 아빠가 엄마의 간병을 했으니 마음 쓰고, 돈 쓰고 힘만 들어 다음에는 간병인 연결업체에 반드시 좋은 사람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할 요량이라고 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엄마의 마지막 간병인. 내가 부랴부랴 양곤에서 한국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일주일 정도 이 간병인이 엄마를 살펴오던 차였다. 아빠와 동생말로는 굉장히 능숙하고, 무엇보다 엄마가 이 간병인을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던 그날. 간병인과 처음 대화를 나누었던 그날. 그 간병인이 대뜸 나에게 “느그 엄마 얼마 안 남은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 말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엄청난 말을 하면서 엄마에 대한 연민이라든지 슬픔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엄마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으니 손이라도 한번 더 잡아드리는 게 좋겠다든지, 마음의 준비를 조금씩 하는 게 덜 아플 것이라든지 그런 진심 어린 충고와는 사뭇 다른, TV 속 스포츠 경기를 보는 듯한 가벼운 들뜸이 느껴졌다.
엄마는 무서울 정도로 예리한 면을 갖고 있다. 특히, 사람의 특성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감지하는데 그 감각이 꽤나 정확했다. 내가 알던 엄마가 이런 간병인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니 참 서글펐다. 간병인의 이어지는 말은 본인이 봐도 엄마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엄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더라. 어제는 호스피스 얘기도 했었다 등등.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나에게 독가시처럼 퍼부어지던 그 말들. 엄마는 자신의 죽음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편했던 걸까. 우리에게도 하지 않았던 엄마의 내밀한 마음을 이런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하는 현실에 참으로 억장이 무너졌다.
하지만 더 속상한 것은 그 간병인이 환자를 다루는 솜씨는 일품이어서 엄마의 상태가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간병인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환자가 편한 자세를 잘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환자가 열이 날 때는 물수건을 어느 위치에 올려야 하는지, 어느 시점에 간호사를 불러야 하는지 등등 처음 맞는 상황에서 경험은 일종의 권력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생명은 시들어가고, 간병인이 드라마를 보는 시간은 늘어만 갔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엄마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간병인에게 슬픈 마음, 약간의 공감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잘 안다. 간병 서비스 비용에 마음의 비용까지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직업인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고 있지 않은지. 유한한 생명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다른 유한한 생명체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자연스레 느껴지는 가엾고 슬픈 마음이 없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정체성 하나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직업인으로서 살기 위해 그 연민의 마음을 버려야 했다면 그 역시 매우 슬픈 일일 것이다.
슬픈 마음을 잃어버린 간병인에게 기대고 있던 우리 엄마의 마지막 모습도 가엾고, 그런 간병인에게 부탁해야 하는 우리 가족의 상황도 애처롭고, 살기 위해 당연한 듯 슬픔 마음을 내던진 간병인도 불쌍하고. 그 간병인만 떠올리면 지금도 두고두고 서글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