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은 바다 Sep 26. 2023

우리 엄마의 장례식

우리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 없어졌다. 아빠의 전화를 받고 옷가지를 챙겨 병원으로 갔을 때 엄마는 그대로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2주 만에 급격히 빠진 살, 황달로 인해 노랗게 물든 얼굴로 내가 알던 엄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 엄마였다. 너무 밝은 형광등이 이 모든 것을 더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만약에 1인실로 옮기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있는 병실에서, 너무 밝은 형광등 아래 한 사람의 인생이 그저 분주하게 끝났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그저 허망했다.     


병원에 소속되어 있는 장례식장 관계자들이 올라왔다. 병원에서 장례식장으로 엄마를 옮겨야 했다. 다른 병실 환자들이 놀랄까 봐 잠시 덮겠습니다 하면서 꼭 큰 밥상 덮개 같은 시신 덮개로 엄마를 덮은 후 빠르게 이동했다. 장례식장 예약을 하려면 사망진단서가 있어야 한단다. 병원 수납창구에서 병원비를 계산하고 장례식장으로 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응급실 옆에 마련된 수납창구에 갔더니 사망진단서가 몇 부 필요하냐고 묻는다. 울컥했다. 방금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엄마를 떠나보냈는데, 세상에 혼자 남은 것처럼 마음이 서늘하고 애달픈데 세상은 참 무심하게도 나에게 이런 질문들을 하는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 가족이 엄마를 보내기 위해 통과해야 할 수많은 질문과 절차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다.     

 

병원비를 다 계산하자 그제야 사망진단서가 나왔다. 세상은 한치오차 없이 죽음에도 값을 받는다. 엄마는 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생을 마감했고, 이 병원 건물 하나하나, 교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 병원 장례식장을 예약하고 있는 이 상황이, 나 자신이 참 무력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빈소 등급이 그렇게 세부적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일반 빈소부터 VIP 빈소까지. 아직도 세상에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다. 3일장으로 할 것인지를 묻는 장례식장 관계자들의 질문에 머리가 하얘졌다. 당연히 3일장이 아닌가? 여기서도 우리가 결정해야 할 사항이 있는 건지. 하지만 너무 자연스레 옆에 있던 아빠와 삼촌들은 3일장을 할 것인지, 4일장을 할 것인지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건 화요일 밤. 3일장으로 한다면 화, 수, 목이 되는데 목요일 새벽에 발인이 되니 실제로 장례식장에서 손님을 치르는 것은 화요일 하루가 된다. 너무 빡빡한 일정이었다. 엄마를 보고 싶어 할 엄마 지인들에게도. 엄마를 제대로 보내기에도. 항암 중인 아빠의 몸이 잘 버텨줄지 걱정이 되었지만 4일장으로 결정하고, 손님들이 분산될 것을 고려하여 적당한 크기의 빈소를 골랐다.      


엄마가 떠난 지 30분여 만에 막내삼촌 지인인 장례지도사가 도착하였다. 그리고 장례지도사를 통해 영정사진, 상복 업체들이 연결되었다. 나는 어느새 상복을 입고 머리에 하얀 머리핀을 하고 있었다. 엄마의 영정사진이 제단에 올라가고 국화꽃 장식이 완성되었다.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선명하고 질서 있게 진행되었다. 부고장이 완성되고 가까운 친지들은 다음날 새벽에 도착했다. 그렇게 엄마의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참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엄마의 친척분들 중에 몇 분은 자진해서 장례식장에 남아 어리숙한 상주들의 빈자리를 조용하게 채워주셨다. 많이 수척해진 아빠도 자리를 잘 지켜주었다. 엄마의 친한 친구들에게 부고장을 보내기에 앞서 전화를 드렸다. 엄마 전화에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어 편의상 엄마 전화로 전화를 돌렸더니 다들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그러다 전화를 건 사람도, 받은 사람도 말을 잇지 못하고 부고 사실을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 하루가 정말 빨리 갔다. 아침을 먹었는데 돌아보면 점심때가 한참 지나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으면 밤이 되었다. 엄마를 생각할 사이도 없이 시간이 마구 흘렀다.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시간도, 공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엄마 친구들과, 멀리서 찾아온 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서울에서 내려온 가까운 친구가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두 팔을 벌린다. 170cm가 넘는 장신인 친구 품 안에서 나는 엉엉 울었던 것 같다. 슬픈 것인지, 외로운 것인지, 억울한 것인지, 서러운 것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그 복잡한 감정 뒤에 남는 것은 허망함이었다.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우리 아빠, 엄마는 늘 젊었다. 시간이 지나고, 서로 나이가 들어도 젊은 얼굴을 기억하는 한, 그저 조금 시간이 지났을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장례식장에 온 엄마의 친구들, 아빠의 지인들을 보니 어느새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중년의 모습이었던 그분들이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었고, 우리 엄마는 이미 생을 마감하고 떠났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절을 하고, 목례하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 완연한 슬픔 속에서도 참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엄마의 큰 사랑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엄마의 삶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고, 때로는 투박했지만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세상 누가 뭐라 해도 우리 아빠. 나의 동생 이 세 사람만은 그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거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엄마의 친한 지인들, 엄마 친척들, 그리고 아빠 친척들까지 엄마가 사랑이 많았던 큰 나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해주었을 때 참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진심이 그렇게 조용히 전해지고 있었구나, 우리 엄마 참 열심히 살았구나. 그것이 엄마의 장례를 무사히 치르게 한 힘이었고, 지금도 용기를 내어 엄마의 장례식을 기록하게 하고 있는 용기의 원천이다.      


그리고 우리 아빠도 참 강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서로 열정적으로 속내를 나누고, 치열하게 싸우고, 또 화해하고 그렇게 평생을 살았던 짝꿍이 먼 길을 떠났고, 그 마음 가눌길 없는 것을 잘 아는데 의연하게 잘 버티어주었다.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감정을 정면으로 받고, 또 자연스레 보내주는 아빠를 보면서 배우자를 잘 보내준다는 것이 저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짝꿍은 장례 3일 차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엄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전까지 남편은 나와 함께 미얀마에 있었다. 엄마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일단 나만 귀국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엄마의 임종 직전, 남편에게 연락을 하여 아이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했고, 남편은 장례 3일 차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남편을 보니 드디어 내 사람이 왔구나 그런 안도감이 들었다.      


남편이 도착하자 입관 절차가 진행되었다. 장례 3일 차가 되니 처음보다는 손님을 맞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감정적으로 동요도 덜했다. 이런 상태에서 또 입관이라는 새로운 절차를 맞아야 하다니. 엄마는 싱싱한 꽃이 가득한 관에 평화롭게 누워있었다. 살이 많이 빠지고, 노랗게 된 얼굴은 화장으로 다 감춰지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모습에 비하면 엄마의 모습에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염을 해주신 분에게 병원에서 오래 고생하신 것 같아 더욱 정성을 들여 모셨다는 말을 듣자 또 눈물이 났다. 고작 수술 후 2주. 아니 상황이 안 좋아진 것은 1주일이었는데 어찌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상황이 안 좋아졌을까 다시 머릿속은 그 일주일을 되새기고 있었다.  장례 절차 하나하나가 마음의 고비였다. 하지만 마음의 고비를 하나 둘 넘기며 어느덧 엄마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엄마의 관 뚜껑이 닫힐 때 나는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입관을 끝내자 유골함 담당 직원이 와 있었다.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말하는 그 담당자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이 빈틈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죽음 이후를 다루는 사업들에 대해 새삼 생각했다. 유골함의 종류도 천차만별이었다. 일반 유골함에서부터 진공 유골함까지. 처음에는 적당히 좋은 장소가 나타나면 엄마를 조용한 곳에 묻어주려고 수목장에 맞는 유골함을 택할까 했다. 하지만 일단 창원 인근 납골당에 임시로 안치할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터라 도자기로 된 일반 유골함을 택했다.      


유골함까지 선택하고 나자 어느새 엄마와의 마지막 저녁이 저물어갔다. 부의금을 따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은 있었지만 크게 정리할 것이 없었다. 엄마의 마지막 가는 길, 엄마가 오신 분들에게 밥 한 끼 대접했다고 생각하니 이래저래 마음도 가벼웠다. 일단 예금으로 가지고 있었던 돈을 빼서 이래저래 들어간 비용을 정산하였다.      


발인날 새벽. 엄마에게 향을 하나 올리고 인사를 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그냥 의례적으로. 좋은 곳으로 가라고. 그렇게 빌었던 것 같다. 리무진을 타고 화장장으로 갔다. 리무진 안은 조금 을씨년스럽게 빛 장식이 과하게 되어 있었고, 불경 읊는 소리가 크게 틀어져 있었다. 엄마는 천주교 세례를 받았던 신자이기도 했지만 몇 십 년 전 일이었고, 가족 중에 종교가 있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불교를 택했더니 마지막 가는 길에는 완연히 불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평화로운 햇살을 맞으며, 리무진을 타고 가는 길이 어쩐지 천국을 향하고 있는 듯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사람들은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의식을 치르고, 위로받고, 또 다음 단계로 나아가나 보다. 화장장이 있는 봉안시설은 생각보다 울창한 산속에 자리 잡고 있어 적막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엄마의 시신이 화장장으로 들어간다는 안내를 받고, 아침을 먹었다. 많이 슬플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리 슬프지 않았다. 이제는 그냥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몸과 마음이 무뎌져 있었다. 


한 시간여 뒤. 엄마의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에 안내받은 곳으로 갔다. 그곳에 가니 유골 분쇄 과정 참관이 힘드신 분들은 별도로 알려달라는 안내가 붙어 있었던 것 같다. 그 안내를 읽으면서 여기서 유골 분쇄도 함께 진행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할 때 즈음, 엄마의 화장된 유골이 나왔다. 그야말로 한 줌의 유골이었다. 아빠의 긴 탄식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나도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덧없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왜 이다지도 열심히 사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던 찰나, 분쇄가 시작되고 있었다. 날카로운 듯 둔탁한 듯 그렇게 엄마의 뼈는 분쇄되고 있었다.      


좋은 날, 결혼식 때에도 이런저런 의례들이 많았겠지. 하지만 나는 결혼식날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행복했고, 생각보다 더 유쾌했던 좋은 시간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장례식의 의례들은 하나하나 쉬이 넘어갈 수가 없었다. 엄마의 영정사진이 올라갈 때, 조상들만 먹는 줄 알았던 제삿밥 같은 제가 올라갈 때, 처음 상복을 입었을 때, 입관할 때, 화장장으로 가는 길, 화장한 엄마의 유골을 보고, 그 유골이 분쇄하는 소리를 듣는 일. 모든 절차들이 마치 새로운 의식처럼 나의 마음에 와 하나하나 각인된다. 그리고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다.     

유골함에 담긴 엄마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뜨거운 유골함을 안치하고 나오는 길. 수많은 유골함들을 보았다. 마치 모든 세상이 죽음으로 덮여 있는 것 같았다. 엄마보다 나이가 든 사람들보다 어린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 사실이 세상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더 위안이 되었다.      


이제 나는 완전히 엄마를 잃어버렸다. 앞으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엄마 없는 시간들을 살아야 한다. 나도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중년을 향해 가는데 이렇게도 무력하고 무기력할 줄이야. 서서히 엄마와의 행복했던 시간을 되새기며, 몸과 마음에 아무렇게나 엉켜 붙어 있는 상처의 피고름들을 닦고 일어나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을 것만 같다. 

이전 03화 우리 엄마의 마지막 일주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