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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Jan 06. 2024

철 따라 맛 따라

드디어 미얀마에도 딸기철이 돌아왔다. 1월 4일 아들과 함께 올해 첫 딸기를 샀다. 미얀마에 온 후, 한국에서는 민감하지 않았던 '제철'과일의 시작과 끝에 나는 온 마음을 쏟고 있다. 


미얀마의 계절은 뜨거운 건기인 여름-긴 우기-그리고 선선한 건기인 겨울이 있다. 대략 4~5월 정도에 시작되어 10월 정도 끝나는 우기를 기점으로 우기 앞 2개월 정도를 짧고 강렬한 여름, 우기 뒤쪽으로 선선하면서 건조한 겨울로 보는 것이 대략적인 구분이다. 하지만 여름, 우기, 겨울 모두 덥기는 매한가지다. 정도의 차이와 강우량의 차이만 있을 뿐 극강의 더위와 극한의 추위를 1년에 다 경험해야 하는 한국 사람으로서는 그저 초여름과 늦여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기후에 제철과일의 시작과 끝은 매우 극명하다. 저온고가 없는 데다 유통시설도 부족하고, 수입되는 과일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어 아무리 큰 슈퍼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과일이 산지에서 직송되는 과일로 채워진다. 물론, 태국에서 오는 두리안, 망고, 남아공에서 오는 포도, 뉴질랜드에서 오는 키위, 어디에선가 오는 사과는 대형 슈퍼에서 1년 내내 대형슈퍼에서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연중 가격이 비싸다. 아들이 씨 없는 작은 포도를 좋아해서 종종 사 먹고는 하는데 500g에 15,000 짜트, 원화로는 약 6~7000원 정도이니 미얀마 물가에 비해서 결코 싸다고 할 수 없다. 그에 반해 비교적 긴 기간 생산되는 미얀마 수박은 1,000 짜트 정도이니 가정 경제를 생각하면 제철과일의 매력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수박은 우리나라 수박 같은 동그란 구 모양이 아닌 복수박 같은 타원형인데 참 신기하게도 실패할 확률이 적다. 맛있다.


12월 초, 아들이 마트에서 딸기를 발견했다. 사달라고 조르는 통에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한국 딸기라고 적혀 있었다. 아주 작은 플라스틱 포장이 되어 있는데 작지도 크지도 않은 딸기가 6개 들어 있었다. 가격은 33,000 짜트. 미얀마로 온 지 1년. 이제 가능한 가까운 곳에서 생산되는 재료로 음식을 해 먹고, 싸게 살 수 있는 과일을 비싸게 사지는 말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 나로서는 아들의 성화가 있었지만 33,000 짜트 딸기를 사줄 수는 없었다. 아들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맛있는 딸기가 나올 테니 그때까지 참아보자고 했다. 다행히 아직 어린 아들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묻지 않은 채 알겠다고 했다. 대신 포도를 사주었다.


그리고 그날, 크고 실한 박(호박 대신 박)이 보이길래 헐값에 사 와 어설픈 박나물과 박국을 끓여보았는데 제법 먹을만했다. 별것 아닌데도 이 나라 사람들이 많이 먹는 식자재로 완성된 요리를 만들어 낼 때 희한한 희열감이 있다. 미얀마에 정착할 초기에는 이 과일들이 어디서 왔는지도 몰랐을 뿐더러 최대한 한국에서 먹던 것과 유사한 재료를 찾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모든 것이 너무나 싸게 느껴져 가격표도 확인하지 않은 채 쇼핑 카트에 마구 쟁여넣었다. 


참 신기하게도 짧은 기간 여행을 할 때는 되도록 그 나라 사람들이 먹고, 즐기는 방식을 따라 최대한 '현지인'처럼 즐기고자 하면서 긴 기간 낯선 곳에서 생존하고, 생활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현지 문화에 대한 접촉면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나 보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호기심이 아닌 위협으로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인가. 미얀마라는 미지의 땅에 대한 불신도 작용했겠지. 


미얀마의 제철과일에 대해 알아가고, 지역에서 나는 식재료로 요리를 만들어 보면서 미지의 영역을 조금씩 탐구해 보고 있다. 어느새 소극적으로 변해버린 내 태도에 기분 좋은 균열이랄까. 올해 첫 딸기는 250g에 6,500 짜트. 사실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아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계산대 앞에 섰지만 원산지가 한국이 아니라 미얀마 북부 샨주란 사실을 확인하고는 제철과일이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6,500 짜트도 싼 가격은 아니지만 미얀마의 열악한 유통망을 뚫고 이 여리고 작은 딸기가 양곤에 도착해 준 대견함으로 기꺼이 치를 수 있는 가격이다. 올해는 딸기-포멜로-망고-망고스틴 + 수박으로 이어지는 미얀마 제철과일의 향연을 온전히 즐겨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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