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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Dec 24. 2023

생애 첫 크루즈 여행

우연히 지인의 소개를 받아 충동적으로 결정한 크루즈 여행. 로열케러비안에서 운영하는 스펙트럼호를 타고 5박 6일 동안 싱가포르를 떠나 말레이시아 포트클랑(쿠알라룸푸르)과 페낭, 태국 푸껫을 거쳐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기필코 동남아 여행을 한번 해 보겠다던 아들과 3개월 차이가 나는 딸아이가 있는 지인네 가족도 흔쾌히 합류하여 우리 6명은 그렇게 생애 첫 크루즈 여행을 떠났다.      


크루즈 출발 전날싱가포르에 도착하다.     

몇 년만의 상기포르인지 모르겠다. 결혼 전 일이니 10년은 더 되었을 듯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출장 결과 보고에 돌아와서 곧 있을 행사 준비까지. 하지만 내가 여행을 떠난 사이, 크게 처리해야 할 일은 없었기에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짐을 꾸렸다. 물론 나의 계획이란 딱 싱가포르에서 남편과 만나기로 한 호텔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정도까지였다. 새벽 6시 집에서 출발. 다행히 아들은 5시 50분에 스르르 기분 좋게 눈을 떴고, 옷만 갈아입히고는 차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는 8시 10분. 체크인하는 줄이 생각보다 길어 시간이 빠듯했다. 하지만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서는 인내심이 올라가는 법인가 보다. 짜증이 날 법한데도 긴 줄을 군소리 없이 기다렸고, 빠듯한 시간 때문에 게이트까지 뛰어갔는데도 토끼처럼 마냥 잘 뛰었다. 고마웠다.     


무사히 비행기에 올랐고, 우리 둘은 이내 단잠에 빠져들었다. 비행시간 3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한 시간 반쯤 자고 일어나서는 밥을 먹으니 비행기는 어느새 착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간에 응급 환자가 둘이나 생겨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대체로 무탈한 비행이었다.     


예상치 않게 한국에서 새벽에 도착했을 남편은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원래는 미리 예약한 숙소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만나게 되니 반가움이 두 배가 되었다. 공항은 별천지였다. 나중에서야 정확한 공항 구조를 알게 되었는데 3개의 터미널이 종합 쇼핑몰 쥬얼(Jewel)을 감싸고 있는 형태이다. 이스라엘 건축가 Moshe Safdie가 구상한 이 거대한 돔 모양의 쥬얼 안에는 놀랄 만큼 큰 인공폭포가 있고, 온통 식물들로 채워져 있어 밀림 속에 숨겨진 현대식 도시 같은 느낌이 든다. 비교적 최근인 2019년에 공식 개장한 건물이라 놀랍도록 질서 정연하고, 마치 미래에 와 있는 듯했다.      


남편은 쥬얼 어딘가 마구잡이로 들어가는 듯싶었는데 미리 검색해 둔 식당이라고 하는 창이공항 내에 있는 Tapas Club. 빠예야와 브리또 등을 시켰는데 맵지 않은 메뉴를 시키니 어른 아이 부담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남편이 없을 것을 대비하여 KKDay에서 미리 예약해 둔 차를 타고 (타다 택시의 2배 가격. 그냥 타다 택시나 그랩으로 그때그때 잡아서 가는 것이 나았겠다 싶다)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서 대충 짐을 부리고, 옷을 갈아입고는 마리나 베이 샌즈(MBS)에 먼저 투숙하고 있는 지인 가족과 접선을 위해 서둘렀다. 우리의 저가 호텔과 MBS는 약 7분 거리. 가까웠다. MBS에 도착하니 명품 쇼핑몰과 호텔의 당당한 위용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미얀마에서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활력과 문명이 주는 신선한 분위기를 마음껏 누렸다.      


워낙 넓고 복잡한 공간이라 지인과 접선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어느새 유모차에서 잠이 든 딸아이와 혼이 빠진 표정으로 넓은 쇼핑몰을 헤매던 지인네와 드디어 접선.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지인네를 보니 반가웠다. MBS 객실 구경을 잠깐 하고는 식물원으로 향했다. 오! 최고급 호텔답게 바다로 크게 난 통창이 보여주는 전망은 아름답고 광활했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싱가포르에서는 돈이 가장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잣대가 된다.      


Gardens by the Bay. 도대체 이 식물원이 무엇이길래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모든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Klook을 통해 미리 표를 끊고 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이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두 살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야 하는 부모로서는 사치일 뿐. 식물원에 무사히 도착한 데 안도감을 느끼며 티켓 창구 앞에서야 어떤 티켓을 끊을까 고민을 하게 되었다. 종류가 많은 듯했지만 결국 이 식물원의 하이라이트인 클라우드 포레스트가 포함된 표를 살 것이냐, 아니냐가 선택의 핵심이었다.      


아이들의 컨디션도 나쁘지 않고, 밥 먹을 시간까지도 상당히 남아 있어 플라워돔과 클라우드 포레스트가 함께 묶여 있는 패키지와 셔틀버스를 구매했다. 52달러. 식물원 입장료로는 매우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이 두 곳을 둘러보고 나온 후, 아니 어쩌면 클라우드 포레스트에 입장하자마자 비싼 입장료가 머릿속에서 잊혀져 버렸다. 움직임 없는 식물들이 지루해 보일 수 있었을 텐데 그 어떤 공연을 보는 것보다 생동감 있고, 활력이 넘쳤다. 특히, 크라우드 포레스트는 광대한 스케일과 잘 짜인 동선을 바탕으로 아바타 콘셉트를 짜임새 있게 완성시키고 있었고, 플라워돔은 작은 규모이지만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화려한 조명으로 요정의 나라 한가운데 서 있는 듯했다. 마지막 입장 가능한 시간을 크라우드 포레스트는 저녁 8:00, 플라워돔은 8:30분으로 설정해 놓은 것을 보면 아마도 규모상으로도 1/2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플라워돔까지 다 보고 나오니 저녁 8: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많이 늦어져 웬만한 식당가에 들어가기는 어려울 듯하여 MBS에 있는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었다. 그리 이르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푸드코트는 앉을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음식들도 나쁘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타다 택시로 이동하여 숙소에 도착! 여행 첫날밤 스르르 잠이 들었다.     

@Tapas Club, Gardens by the Bay, MBS


크루즈를 타다 - 여행 둘째 날

지인 가족도 우리 가족도 크루즈 여행이 처음이었다. 승선 절차가 복잡하지는 않을지, 사람들이 너무 많지는 않을지 걱정을 하며 조금 이른 시간에 승선하기로 결정했다. MBS에서 거한 조식을 먹고(조식 가격을 모르고 갔었는데 한 사람당 $62이라고 한다. 가격을 듣고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이미 우리는 웨이터의 안내를 받고 있었다. 그래도 위안이라면 많이 먹는 아들이 아직은 공짜라는 사실) 지인의 체크 아웃을 기다리니 어느새 11시 반. 원래 크루즈 승선 전에 타고자 했던 관람차는 12시부터 시작하고 평균 대기 시간이 40분 정도라고 한다. 아이들과 땡볕에 나가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어영부영 크루즈에 좀 더 빨리 오르기로 결정했다. 싱가포르를 떠나기 조금 아쉬운 마음에 크루즈 터미널과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Maritime Gallery에 들러보기로 했다. 알고 보니 Maritime Gallery는 싱가포르 작은 섬들로 가는 배들을 타는 여객 터미널 2층에 마련된 작은 관람실이었다. 우리를 태워다 주신 기사님께서 크루즈를 타러 가는 것 아니냐고 재차 확인을 하신다. 크루즈를 타려면 이 터미널이 아니라 크루즈 터미널로 가야 한다며 외국인 관광객 손님을 이곳에 내려다 주는 것은 처음이라고. 시간이 남아 잠깐 들르는 것이라 하였더니 그제야 안심을 하시고, 잘 보고 가라고 한다.     


터미널 2층에 작게 자리 잡은 박물관은 아이들에게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배의 키를 실제 운전하면서 난파된 선박을 구하거나 불을 끄러 다니는 게임, 부두의 컨네이너를 운반하는 게임, 디지털의 힘을 한껏 활용한 신기한 게임들이 곳곳에 있었다. 지인의 딸아이는 그림 그리기와 자석 도형 붙이기 게임에, 아들은 배를 운전하는 게임에 푹 빠져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날카롭게 내리꽂는 듯한 볕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다행히 작은 여객 터미널과 크루즈 터미널은 지붕이 있는 외부 통로로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덕분에 짧지 않은 거리였지만 무거운 짐가방과 아이를 끌고 무리 없이 크루즈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1시 경었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짐가방을 붙이고, 승선 체크인을 하고, 배를 타는 절차가 간단하지 않았고, 안내에 이끌려 이곳저곳 긴 거리를 이동해야 해서 오히려 지루하지는 않았다. 여권을 제출하고, 배에 타니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수 백개의 여권이 한 곳에 모여있는 것을 보니 신기했다. 승선하자마자 객실을 찾아 문 앞에 도착하니 아이 것까지 포함한 세 개의 방 키가 문에 부착되어 있었다. 여권이 없는 크루즈 기간 동안 우리를 증명해 줄 신분증 같은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을 하루가 지나서야 알았다. 다른 나라에 입항할 때 따로 여권 검사를 하는 대신 배에서 전자 시스템을 통해 방 키로 승선, 하선 기록을 체크한다. 나는 주로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승선, 하선시 반드시 모자를 벗으라는 지시를 받을 만큼 나름 엄격성을 기해 출입 체크가 이루어진다.     


크루즈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시간을 들여 한 층 한 층 둘러보는데만 꽤 많은 시간이 들었다. 빨리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이미 수영장에서 수영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일행도 있었다. 한시 경, 어슬렁거리듯 들어온 우리는 일찍 온 편에 속하지 않는구나 뒤늦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크루즈에는 아침부터 승선할 수 있다고 하니 크루즈를 백배 즐기려면 마음먹고 아침부터 탑승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싶었다. 넉넉히 3시 반까지 뷔페에서 밥을 먹을 수 있어 늦은 점심을 먹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다시 뷔페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배에 올랐던 첫날은 피곤하기도 했던 터라 공연을 볼 생각도 없이 급하게 마무리했다.      

@MBS RISE(조식뷔페), Maritime Gallery


크루즈 둘째 날 : 포트클랑과 쿠알라룸푸르 - 여행 셋째 날     

사실 말레이시아 포트 클랑에서 내릴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잘 자고 일어난 아침, 생각해 보니 크루즈에서 아이들이 놀 거리도 제한되어 있거니와 쿠알라룸푸르(KL)까지의 한 시간 이동거리를 잘 활용하면 낮잠을 효율적으로 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식을 먹기 전, 일행과 상의를 하고는 조식을 먹자마자 하선을 하여 KL로 나갈 채비를 했다. 10시 반쯤 그랩을 통해 6인승 태시를 불렀는데 낡디 낡은 4인승 같은 6인승이 도착했다. 교통체증도 있어 1시간 반이 걸렸다. 계획은 쌍둥이 빌딩(페트로나스 트윈타워) 전망대에 올랐다가 점심을 먹는 간단한 계획이었는데 친절하지 않은 택시 기사 때문에 쌍둥이 빌딩이 있는 거의 반대편 컨벤션센터 입구에 강제로 내려졌다. 내리기 전, 쌍둥이빌딩까지는 거리가 있어 재차 확인했더니 여기가 컨벤션센터(KLCC)이니 여기서 걸으면 얼마 되지 않는다는 확신에 찬 이야기를 듣고 내렸더니 쌍둥이 빌딩까지 도보로 20분이 남은 상황. 다행히 KLCC 입구를 잘 찾아서 들어가 지하로 연결된 길을 따라 강제 쇼핑도 하고, Cold Stone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아들의 첫 아이스크림도 사서 먹이다 보니 어느새 쌍둥이 빌딩에 도착했다. 하지만 택시기사에게 괘씸한 마음은 아직도 가시질 않는다.      


우리가 너무 준비 없이 쌍둥이빌딩에 와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전망대에 올라가려면 5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모든 표는 매진되고 5시 표만 남아있는 상황. 우리는 4시까지는 크루즈 터미널로 돌아가야 안전하게 배에 오를 수 있었던 상황이라 고민 없이 전망대에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망대 인근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 외관의 위용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어 먼 길을 달려온 것이 아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전에 준비를 좀 더 했더라면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KLCC 푸드코트 그 광활한 광장과 같은 곳에서 앉을자리 찾기가 힘들었다. 할 수 없이 푸드코트 한편에 자리 잡은 태국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코엑스만큼이나 복잡하고 큰 KLCC에서 어떻게 그랩을 잘 탈 수 있을까 고민을 했었는데 어떤 입구로 나가든 그랩 정류소 이름이 잘 안내되어 있어 기사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돌아갈 때 택시는 크고 좋은 6인승 차여서 편안하게 앉아 올 수 있었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타자 마자 잠이 들었다. 차도 막히지 않아 1시간쯤 걸려 3시 반 터미널에 무탈히 도착.      


객실에서 조금 쉬다가 비틀스 모방밴드의 조금은 어설픈 공연을 보고는 8시 반 예약해 일본식 철판요리 식당에 갔다. 임박해서 예약을 했더니 식사 가능한 시간이 늦은 시간대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원래는 MBS에서 얼떨결에 조식을 얻어먹게 된 지인에서 제대로 된 한 끼를 대접하고 싶어 예약한 식당이지만 1인당 $64달러를 주면서까지 다시 가고 싶지는 않은 철판요리 집이었다. 물론 철판요릿집의 흥겨운(?) 분위기와 다소 어설프지만 현란한 퍼포먼스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아들이 즐겁게 저녁을 먹은 터에 불만은 없지만 생각보다 먹거리가 다양하지는 않았다. 18%의 부가세를 내고 나니 상당히 많은 돈이 훌쩍 빠져나가 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철판 뒤집개를 던지며 퍼포먼스를 펼치며 관객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요리사에게 매번 흔쾌히 반응을 해주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한 사람씩 던져주는 달걀을 입에 넣을 때까지 받아먹었어야 되었었는데 하다 보니 슬금슬금 짜증이 났다. 지인의 표현처럼 가기 싫은 업무만찬에 끌려가 좋은 요리를 먹으면서 스트레스받는 형국이었다.      


많은 양의 저녁을 먹고는 바닷바람을 쐬며 크루즈 야외 산책로를 걸었다. 바람이 부는 바다 한가운데 이렇게 평온하게 서 있을 수 있다니. 그저 바람을 안고 걸어 다니는 것만 해도 마음이 벅찬 느낌이 들었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Cold Stone,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전망대(1층까지만), KLCC 푸드코트 내 Para Thai 

 

크루즈 셋째 날 : 페낭에 가다 - 여행 넷째 날

크루즈 여행을 누가 여유로운 여행이라고 했던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크루즈 여행은 생각했던 것보다 빡빡한 일정에 많은 체력을 요구했다. 추운 겨울날씨를 견디다 갑자기 동남아로 여행온 지인네 가족은 크루즈 에어컨 바람에 기침을 하며 투혼 하듯 여행을 이어나갔다.     


페낭의 겨울날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웠다. 습도가 높지 않았지만 해가 무서울 정도로 내리쬐고 있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따로 있었다. 아침 10시가 넘어 하선하여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 달리자 페낭의 주도 조지타운의 대표적인 벽화거리가 나왔다. 택시를 타는 10분 동안 아들은 잠이 왔던 걸까? 택시에서 내려 불볕더위가 시작되는 순간, 잠이 온다. 택시를 다시 타자며 울음을 터트렸다. 원래는 벽화거리를 잠시 걸으면서 벽화도 보고, 상점 구경도 한다는 야무진 계획이었으나 아들은 걸을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 가까이에 귀여운 Ludwig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어 고민할 새도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헤이즐넛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고, 기운을 차린 아이들을 이끌고 다시 도보 여행에 도전. 하지만 아들은 끝내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크루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무작정  옆에 보이는 삼륜자전거(trishaw)를 잡아타기로 했다. 1 가족당 한 대씩 빌려 총 80링깃에 30분 동안 벽화를 돌아보기로 했다. 몸은 편해졌으나 더위는 그대로였다. 아이들은 각자의 삼륜자전거 안에서 벌게진 얼굴로 이내 잠이 들었다. 30분 동안 구석구석 벽화를 찾아 달리는 삼륜차는 나름 재미있었다. 벽화가 어디 숨어있는지 힘들여 찾지 않아도(물론 과거 몸과 마음이 가벼웠던 나였다면 그 과정을 여행의 백미라 생각했겠지만) 되어 아이를 안고도 몇 개의 벽화를 편하게 보는 사치를 누렸다. 하지만 삼륜자전거 안에서 우리는 점검 통구이가 되어 갔다. 정오를 향해 가던 시간, 삼륜자전거 기사님들도 힘들고, 우리에게도 쉽지 않은 30분이었다. 찻길을 달릴 때는 매연을 그대로 맞았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 강렬한 햇볕 탓에 견디기 힘들었지만 나중에 사진들을 보니 너무나 아름답게 찍혀있었다. 사진에는 우리가 끊임없이 흘린 땀, 기사들의 힘겨운 한숨소리, 축 쳐진 아이들의 무게 어떤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현실의 흔적은 없어지고, 아름다운 사진만이 남았다.     


삼륜자전거 타기를 마치고 돌아온 George Town 한편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Bombay Kitchen이라는 곳이었는데 깨끗하고 넓은 식당에 친절한 직원들, 맛있는 음식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페낭을 찾게 된다면 다시 한번 찾고 싶은 식당이었다.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지 일주일 후, 페낭으로 휴가를 떠난다는 직장 동료가 있어 이 식당을 얼른 추천해 주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극락사를 한번 올라가고 싶었지만 이 더위에 극락사의 계단을 아이들과 함께 걸어 다닐 자신이 없었다. 대신 청팟제 맨션(Cheong Fatt Tze Mansion)이라고 하는 화교 부호 청팟제의 집을 방문해 보기로 했다. 19세기말 지어진 중국 부호의 집이긴 하나, 알람브라 궁전의 중전이 연상될 만큼 묘하게 아랍식 영향을 받은 듯도 했다. 푸른색 외벽과 아름다운 중전이 인상적인 건물이었다. 같은 건물에서 호텔도 운영되고 있어 하룻밤쯤 느긋하게 저택에 묵으면서 옛 부호의 삶을 재현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페낭. 더웠다. 너무 더웠다. 하지만 그 날씨에 무리를 해서라도 벽화거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선택에 안도감을 느낀다. 숨겨진 보석 같은 아기자기한 이 도시를 언제 다시 한번 와보겠는가!  크루즈 여행은 잘 짜인 샘플러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곳. 본격적인 여행지를 고르기 앞서 나에게 맞는 여행지를 고르기 위한 맛보기 여행이란 생각을 하면서 그렇다면 조지타운을 다시 한번 방문해 볼 의향이 있는가? 나에게 물어본다. 아마도 우연히 기회가 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들르겠지만 이 도시를 위해 다시금 큰 용기를 낼 만큼 특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나의 전반적인 평가이다.      


페낭에서의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크루즈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인기 공연 중 하나인 실크로드를 관람하러 갔다. 크루즈를 타기 전부터 매진이 되어 예약할 수 없어 무작정 시간에 맞춰 공연장에 가보기로 했다. 5박 6일 동안의 크루즈 일정 동안 4번의 실크로드 공연이 있었는데 모든 공연이 매진이라 더 호기심이 생겼던 공연이었다. 아이와 샤워를 마치고 도착하니 6시 15분 공연 시작시간 정각. 이미 예약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열고 있었다. 자리는 만석이었지만 Two 270 공연장의 특성상 공연장 바로 뒤에 마련된 테이블 좌석도 있고, 서서도 공연 관람이 가능했다. 우리는 공연장 바로 뒤 좌석에 앉아 공연을 관람했다. 크기로 압도하는 거대한 스크린과 박진감 넘치는 영상이 작은 공연장의 한계를 뛰어넘어 수백 명의 출연진이 나오는 거대한 역사물을 보고 나온 듯한 착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노련한 30명의 공연자들과 곳곳에 효율적으로 설치된 조명, 웅장한 음향 시설, 단차를 활용한 공연장 설계 모든 것이 어우러져 순간 크루즈 공연이라는 것을 잊었다.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서 인도로 이르는 길에서 만나는 다양한 민족들의 모습을 그려낸 단순하고, 직관적인 이야기도 높은 몰입도에 한몫했다. 어린 아들도 45분 내내 집중하며 공연을 관람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세상의 기술들이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Ludwig, Bombay Kitchen, Cheong Fatt Tze Mansion 그리고 Silk Road 공연!


크루즈 넷째 날: 드디어 푸껫 - 여행 다섯째 날

도대체 푸껫은 어떤 곳이길래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푸껫에 내릴 준비를 했다. 크루즈 안내원들도 한껏 고무된 목소리로 하선 안내를 연신 했다. 특이한 것은 크루즈선이 특정 터미널에 정박한 것이 아니라 해상에 떠 있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작은 배(텐더)로 옮겨타 빠통 해변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비행기로 푸껫에 오면 차로 2시간은 걸려 와야 하는 빠통 해변을 텐더로 10분 만에 갈 수 있다니! 크루즈의 매력은 반전의 연속에 있는 걸까. 7시 반 첫 텐더를 기준으로 2시간 동안은 텐더 티켓이 있는 사람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데 9시 반 이후에는 선착순으로 탑승했다. 7시부터 텐터 티켓을 나눠주길래 남편은 줄을 서서 텐더티켓을 받아왔다. 하지만 예상대로 무용지물이었다. 10시가 되어서야 텐더를 타게 된 우리는 그저 선착순으로 배를 탔다.      


먼저 텐더를 타게 된 우리 가족은 내린 선착장에서 지인네 가족을 기다렸다. 선착장에 있는 카페에서 코코넛을 하나 시켰는데 시원하고 달았다. 80밧의 행복. 택시 호객을 열심히 하는 기사들의 호객 행위를 뒤로 하고 빠통 해변 모래사장을 걸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군말 없이 물놀이를 하겠다고 해서 준비해 온 수영복을 갈아입히고 입수 준비를 했다.     


튜브 펌프를 가져오지 않았던 터라 남편은 얼굴이 새 빨게 질 때까지 튜브를 불었다. 하지만 2번 정도 썼을까. 아이들은 잔잔한 파도도 크게 느낄 만큼 아직 어렸고, 두어 번 튜브를 타더니 무섭다고 모래사장으로 기어 나왔다. 그래도 모래 장난이 재미있는지 모래 구덩이를 파기도 하고, 모래를 던지며 신나게 놀았다. 모래도 곱고, 물은 맑고, 모래를 파니 조개들이 가득했다. 파도가 훔치고 간 모래사장에는 더 깊은 모래로 부지런히 파고드는 수백 개의 작은 조개들이 있었다. 어찌나 필사적으로 모래를 파고드는지 소리가 들릴 듯한 착각이 들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해변 의자와 비치파라솔을 하나씩 빌렸는데 200밧인지 300밧인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두 가족이 짐을 놓고 쉼터로 활용 가기에는 손색이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신나게 모래장난을 한 아이들은 슬슬 지쳐갔다. 아이들의 집중력은 생각보다 짧고, 에너지가 빠르게 충전되는 만큼 방전도 생각보다 빠르다. 멀지 않은 곳에 간이 샤워장이 있었는데 샤워 헤드가 높게 달린 탓에 물이 찬 폭포처럼 쏟아져 아이들이 좀 당황했지만 대충 씻기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20밧짜리 싸구려 샤워장이었기 때문에 비치되어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었다. 크루즈에서 타월 하나를 가져온 터라 그 타올로 어른 둘, 아이 둘이 몸을 닦았다.      


말레이시아 KL에서는 태국식, 페낭에서는 인도식을 먹었던 터라 태국에서는 태국식을 먹어보자는 지인 말에 빠통 해변 근처 유명한 태국 음식점을 찾았다. 인터넷에서 음식점을 검색하고, 들어가 보니 Burasari Resort라고 하는 상당히 고급 리조트 안에 있는 고급 태국식당이었다. 아이들 2인 포함 6명의 일행이 배불리 먹었더니 10만 원이 훌쩍 넘었지만 그날 먹었던 똠얌꿍과 소프트셸 옐로카레는 맛을 잊지 못할 만큼 맛있었다.      


점심을 잘 먹고 났더니 아이들은 졸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택시 기사들이 앞다투어 흥정을 했던 곳을 찾았다. 아이들의 낮잠시간을 확보할 만큼의 드라이빙 시간이 필요했다. 남편들이 흥정을 하여 2시간에 1200밧 대형차를 빌려왔다. 아이들은 이내 잠이 들고, 우리들은 차를 타고 빠르게 스쳐가는 푸껫 해변가를 감상했다. 한 시간을 달렸는데도 푸껫 해변도로의 1/10을 채 달리지 못했다. 푸껫은 생각보다 큰 섬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언덕이 있어 가파른 고개를 넘을 때마다 새로운 해변가가 나타났다. 유명 해변가들마다 긴 상점들이 즐비하여 보는 재미가 있었다. 여러모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굽이굽이 아름다운 자연이 있었고, 관광객이 하나둘씩 모이자 인프라가 형성되고, 그러자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푸껫을 생각하니 쓸쓸한 미얀마의 해안도시 시트웨가 갑자기 떠올랐다. 마음이 쓰렸다.      


드라이빙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낮잠을 잘 자고 일어나 꿈틀대고 있었다. 빠통 해변으로 다시 돌아와 근쳐 쇼핑몰에 내리니 1시간 반 가량이 지나 있었다. 쇼핑몰은 선착장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었다. 기사님께 잠깐 쇼핑하는 동안 기다려 달라고 했더니 여기서 기다릴 수 없다고 하며 천 밧만 받고는 미련 없이 가버렸다. 쇼핑몰에서 지인네는 과일을, 우리는 태국 꿀을 하나 사고는 이제 선착장으로 돌아갈 시간. 무슨 오기였을까. 옆에 붙어 있는 전통시장을 거쳐 걸어서 20분 정도면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네 구경 겸 걸어서 선착장으로 가보기로 했다.      


아이를 데리고 20분은 정말로 긴 시간이었다. 전통시장은 전통시장이라기보다는 마사지와 대마 상점이 즐비한 잡동사니를 파는 상점들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아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잘 따라와 주었고, 그런 아들을 대견하게 생각하다 보니 해변이 나왔다. 6시 뉘엿뉘엿 해가 지는 석양 속의 긴 해변은 정말 아름다웠다.      


분명히 우리가 물놀이를 할 때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한산한 해변이었는데 해가 넘어가고 있는 저녁 해변은 활기가 넘쳤다.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고, 아름다운 색깔의 낙하산들이 끊임없이 뜨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하늘에 비현실적인 색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푸껫의 매력은 이제 시작되었는데 우리는 배로 돌아갈 시간. 아쉬움은 남지만 저녁 푸껫 해변을 눈에 담을 수 있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선착장에서 텐더를 기다렸다.     


텐더를 타고, 크루즈에 올라타자마자 무시무시한 에어컨의 냉기가 흘러져 나왔다. 아 이제 집에 왔구나. 안도감과 피곤함이 몰려왔다. 숙소에 들어오자 샤워를 하고 나온 아이는 저녁을 먹기도 전에 잠을 자겠다며 칭얼대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그럴까 하는 마음에 불을 끄고 재우려는데 또 마음이 바뀌었는지 저녁을 먹으러 가잔다. 얼른 아이를 데리고 정찬식당으로 향했다. 다행히 아이는 맛있게 밥을 먹고, 빠르게 돌아와 잠을 잤다. 빠르게라고 했지만 이미 10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Burasari Resort 내 Kantok Restaurant, Patong Shopping Center


여행 여섯째 날: 온전히 크루즈     

온전히 크루즈를 즐길 수 있었던 시간. 크루즈를 탄 첫날은 모든 것이 낯설었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했다면, 크루즈 마지막날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한가롭고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Two 270 카페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는 아이와 함께 물놀이를 했다. 어린아이가 탈 수 있는 물놀이 기구가 많지 않았고, 깊은 물에는 들어가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물놀이는 아니었다. 크루즈 풀장에 한번 가보았다는데 의의를 두고 20분 동안의 아주 짧았던 물놀이를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시간이 남아 냅킨 접는 강좌를 들으러 갔다. 세상 별 희한한 강좌가 다 있다며 코웃음을 치던 남편이 가장 열정적으로 냅킨을 접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본인이 오후에 크루즈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수건을 접는 강좌를 보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냅킨 때보다 3배는 더 많았다고 하면서 참 신기하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자 아이는 급속히 졸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3일 동안 아이는 참으로 쉴 새 없이 걸었다. 몸살이 나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 아이의 낮잠을 빌미로 우리 가족은 한낮에 단잠에 빠졌다. 한 시간쯤 잤을까? 아이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2시간이 흘러도 꼼짝을 하지 않더니 3시간이 훌쩍 흐른 후에야 기분 좋게 일어났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 남편이 실시간 배의 위치를 확인하더니 배는 이미 귀항지인 싱가포르로 돌아와 있다고 했다.      


마지막 저녁 일정으로 Effectors라는 어린이용 공연을 보기로 했다. 초능력자들이 악당을 물리친다는 히어로물이었다. Royal Theater에서 하는 공연이었는데 꼬마 손님들이 있는 집은 모두 다 온 모양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무대 조명이 화려했고, 넓지 않은 공연장에서 미니 드론을 이용한 하이라이트도 있었다. 하지만 배우들의 가창력의 문제였던 걸까? 너무나 단순한 줄거리의 문제였던 걸까? 기술이 화려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훌륭한 공연이었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박진감 넘치고, 화려한 공연이었으니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아이들은 실크로드에서 보여주었던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공연을 보고 8시가 다 되어서야 정찬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늦은 시간까지도 꽤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3시간의 낮잠시간을 가진 우리와는 달리 지인네 딸아이는 한숨도 자지 않았다고 했다. 크루즈에서만 온전히 시간을 보낸 그날이 가장 힘들었던 날이라고. 여유 있게 밥을 먹고는 데크로 올라가 산책을 하려고 했더니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밤, 크루즈 안에서 시원하게 맞는 바닷바람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냅킨 접기 강좌, Effectors 공연


여행 마지막: 다시 싱가포르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승선할 때는 여행의 설렘으로 그 길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하선할 때는 어쩐지 더 오래 걸리고, 지겨운 기분이었다. 방마다 지정된 하선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정해진 하선 시간에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전 날, 짐가방을 방 앞에 두면 그다음 날 지정된 터미널까지 대신 옮겨준다. 짐을 맡기지 않는 사람들은 짐을 끌고 긴 거리를 이동하는 대신, 하선 시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하선은 7시 반부터 시작하여 9시 즈음 끝이 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있는 우리 일행에게는 다 무의미한 이야기. 9시도 겨우 맞추어 하선을 시작했다. 하선 막바지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줄은 느릿느릿 움직여 배에서 내리니 10시 반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일주일 간의 여행을 마친 상황이라 많이 지쳐있었다. 지인네는 그날밤 바로 한국으로 귀국, 우리 가족은 다음날 오전 비행기로 미얀마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무리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공항 근처 호텔로 예약해 놓았던 우리는 우선 많은 짐을 놓아두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리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 공항에서 싱가포르식 갈비탕이라고 하는 바쿠테를 먹었다. 맛이 강했으나 맛있었다. 그리고 주얼 5층에 마련되어 있는 아이들의 놀이터. 캐노피 파트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어려 탈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지만 작은 공간에도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한참을 뛰어놀더니 졸린 모양이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최소 30분간의 낮잠시간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물론 공항 근처에 있는 호텔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으나 호텔방에 가면 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공항에서 30분 이상 떨어져 있는 동물원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의 목적은 동물원에 있다기보다 택시를 탄 이동시간 확보에 있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내 잠이 들었고, 택시는 부지런히 달려 동물원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어찌나 깊이 단잠에 빠졌는지 택시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잤다. 30분 즈음 흘렀을까. 아이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동물원을 돌아보기에는 시간도 늦었고, 애초 돌아볼 계획은 아니었던지라 기념품샵에 들르기로 했다. 예쁜 기념품들이 많았다. 


그리고 다시 택시를 타고 싱가포르 도심으로 왔다. 오후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의 첫날, 숙제처럼 미루어두었던 관람차를 타기로 했다. 관람차 표를 샀더니 관람차와 타임캡슐 전시관 관람이 함께 묶여 있는 패키지표를 받았다. 타임캡슐 전시관 관람은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관람차를 타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싱가포르의 역사를 볼 수 있는 타임캡슐 전시관을 먼저 본 후, 정해진 동선에 따라 관람차를 탔다. 생각보다 관람차 한대의 어마어마했다. 20명도 넉넉히 탈 수 있는 규모였다. 우리 6명과 한 커플 총 8명이 탔더니 널찍한 전용 공간을 빌린 듯 쾌적했다. 높이 높이 올라가서 편안하게 즐긴 야경. 싱가포르와 이제 안녕이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 아쉬웠다. 관람차가 생각보다 천천히 돌기도 하거니와 중간중간 멈춰 서서 아이들이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갈 때쯤, 다행히 관람차 여행은 끝나 있었다.     


모든 일행들이 멀라이언상을 안 봐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싱가포르의 상징인데 그럴 수 있나. 다행히 택시로 3분 거리에 멀라이언상이 있었고, 1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멀라이언 공원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인공조명들도 이렇게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니. 대체로 싱가포르에서는 고도로 잘 짜인 인공 조형물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아름다운 조형물을 보면서 지인네 가족이 고대하던 칠리크랩을 먹기로 결정했다. 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이 또한 문화체험으로 싱가포르에 왔으면 한 번은 먹어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죄책 감 없이 크랩을 시켰다. 아이들과 함께 먹을 것이라고 하니 맵지 않은 크리미 크랩을 시켜보란다. 크리미 크랩과 볶음밥을 시켜서 같이 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그대 이상이었다.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참 신기한 것이 서로 본체 만 체 하거나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 신경전을 벌이던 아이들이 마지막날 슬금슬금 친해지더니 멀라이언상 앞에서는 서로 방귀소리를 내며 까르르 웃고 또 웃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는 그랩 택시 안에서는 이미 절친이 되어 있었다. 신기한 것들. 이 작은 두 머릿속에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이번 여행이 남아 있기나 할는지. 그렇지만 여행 마지막이 이렇게 즐겁다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타지에 나와 아프지 않고, 여행을 완수한 우리 가족 그리고 지인네 가족을 마음속 깊이 칭찬했다. 나 혼자. 조용히. 

@Songfa Bakuteh, Singapore Flyer, Singapore Zoo(기념품샵), Merlion Park, Palm Beach Seafood



덧붙이기.


1. 크루즈는 바쁘다.

의외로 크루즈에 탄 사람도, 크루즈에서 일하는 사람도 늘 바쁘다. 누가 크루즈에서 절대 휴식이 가능하다고 했던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야 크루즈를 탄 후, 온갖 유혹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유롭게 앉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범인들이야 크루즈가 제공하는 수많은 기회들을 뿌리치기 힘들다. 


우리만 해도 포트클랑에서 하선하지 않고 여유롭게 크루즈를 즐기고자 했으나, 언제 또 쌍둥이빌딩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며 계획을 바꾸었다. 크루즈가 정하는 기항지에서 내리지 않겠다는 담대한 결정은 웬만해서 지켜내기 힘들다. 그렇다면 낮시간은 정착지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여행을 하고, 저녁에는 크루즈에서 제공하는 공연을 보다 보면 녹초가 되어 숙소로 돌아가게 된다.  


또 손님들과 더불어 수천 개의 방을 청소하고, 밥을 먹이고, 안내하는 크루즈 직원들은 늘 바쁘다. 특히나 끼니때마다 정찬 식당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정리하고 안내하는 직원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그 많은 손님들 한 명 한 명을 정성을 들여 안내했다. 거대한 크루즈에서 각자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바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 해도 무언가 숙연한 생각이 든다. 


2. 정성을 들인 만큼 얻어가는 것도 많다.

어떤 일인들 그렇지 않겠나. 하지만 크루즈 여행은 제한된 일정에 의외로 많은 일들을 동시에 해야 되기에 사전에 정성과 시간을 들인 만큼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다. 우선 크루즈에 승선하여 크루즈의 구조를 파악해야 하고, 크루즈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도 어느 정도는 숙지하고 있어야 하며, 끼니를 잘 먹으려면 어떤 시간에 가서 먹는 것이 좋을지 약간의 연구가 필요하다. 

 

시간의 제약을 덜 받는 뷔페식당에 가서 먹을지, 조금 더 정성 들인 음식을 조금 더 고급진 분위기에서 하지만 맞춰진 시간에 가서 먹는 정찬 식당에서 해결할지, 아니면 웃돈을 더 주더라도 고급 식당에서 먹을지 등등 수많은 선택지들을 빠르게 취사 선택하려면 그만큼 사전에 공부를 해오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그리고 크루즈에 승선하면 기항지 일정이 순식간에 다가온다. 우리야 어린아이들이 있어 애초 어떠한 사전 계획도 무의미했지만 기항지에서의 일정도 의외로 넉넉하니 잘 계획을 한다면 크루즈에서의 프로그램도 기항지에서의 프로그램도 알차게 활용할 수 있을 듯하다. 


3. 크루즈는 거대한 산업이다.

크루즈는 오래된 사업이다. 타이타닉이 빙하와 충돌한 사고가 있었던 것이 1912년이니 이미 10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러니 그간 정말 많은 노하우들과 협력 업체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배"라는 공간적 특성 때문인지 거대한 몸체 사업과 그와 관련된 수많은 협력사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각 기항지의 크루즈 터미널과 크루저선과의 관계, 크루즈에 승선한 많은 공연팀, 크루즈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강의들을 제공하는 강사들, 프로페셔널한 웨이터들, 크루즈 시간에 맞춰 도착해 있는 각 지의 택시 기사들까지 하나의 배가 먹여 살리는 수많은 식구들이 눈에 선하다. 


특히나 로열 캐러비언사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크루즈 회사라고 하니 보통의 크루즈보다 더 거대하고, 관련된 협력사들도 많을 성싶다. 이러한 사업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신기할 따름이다. 크루즈를 처음 탄 나로서는 하나의 사업이 굴러가는 방식을 멀리서나마 구경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매일같이 전체 화재경보장치를 점검하고, 소화기 하나하나의 작동 상태를 점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탑승객들에게 높은 만족도를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사업이라고. 오래된 사업이라고는 하나, 나에게는 아직 미지의 세계 같은 크루즈 여행을 하며 쓴 길고도 별것 없는 여행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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